- :: 18세기
황실·귀족 음료서 서민층 확산… 유럽 각국 커피 재배 나서
처음에 커피는 왕실 사람들과 귀족층만 즐길 수 있는 고급 음료였으나 점차 광범위한 사회 계층으로 퍼져갔다. - 17세기에는 아직 낯선 물질이었던 이 음료는 18세기가 되면서 ‘부르주아의 음료’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 다시 시간이 흘러 그 다음 세기에는 커피에 설탕을 듬뿍 집어넣어서 칼로리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일반 서민들에까지
- 확산되어 갔다.
-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수입량도 늘어났고, 결국은 모카 인근 지역의 생산에만 의존하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유럽 각국은 곧 자국 식민지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1712년에 네덜란드가
- 자바 섬에 커피나무를 이식한 것을 시작으로 곧 부르봉, 카옌, 마르티니크, 자메이카, 생도멩그 등 여러 섬에서 커피가
- 재배되었다. 유럽 국가들은 이제 국내 수요를 맞추는 것을 넘어 세계 다른 지역에까지 수출했다.
- 네덜란드가 자바 커피를 페르시아와 인도에까지 판매한 것이 한 예다. 그리하여 커피는 문명의 경계를 넘어 세계인의
- 음료로 성장해 갔다. 커피는 처음 접하면 쓴맛과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음흉한 검은색 때문에 거부감을 갖게 마련이지만,
- 일단 한번 마시게 되면 곧 길들여지게 된다.
- ▲ 에티오피아의 한 마을에서 커피를 건조시키고 있다.
- 석유 다음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무역품목인 커피는 전세계적으로 매일 10억컵이 소비되며 연간 판매액만 800억달러에 이른다.
- / photo 조선일보 DB
- :: 19세기
우리나라에도 상륙… 고종황제가 최초의 매니아
19세기 말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커피가 들어왔다. -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찍 커피를 마신 사람 중 한 명이 고종황제일 것이다.
- 1896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흉흉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은
- 왕세자와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 동안 머물게 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른다. 그 동안 친일내각이 몰락하고, 김홍집·정병하 같은 대신들은 군중들에게 타살 당하고,
- 내각은 다시 옛날식 의정부(議政府)로 되돌려지고, 많은 이권들이 러시아 측에 넘어가고….
- 국사(國事)가 이처럼 처연하게 돌아갈 때 고종황제께서는 러시아 공사 측이 대접하는 커피를 마시며 아픈 마음을 달래고
- 계셨다.
- 커피의 쓴맛과 검은 색깔 때문에 보약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 왕세자와 함께 매일 아침 대접에 커피를 가득 담아
- 좍 한 번에 들이켰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고종황제가 커피 향을 음미하고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커피 맛을
- 제대로 알고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 이처럼 왕실에서 시작된 커피 소비가 곧 신분 높은 고관들에게 퍼지고, 이어서 문인들이 다방에 모여 유유자적 인생과
- 문학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품목이 되었다가, 1960~1970년대의 독특한 ‘모닝(커피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 마심으로써
- 영양보충까지 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도 유럽 커피의 역사와 거의 같은 궤적을 보인
- 셈이다.
:: 커피의 발전
이성적 음료, 육체노동서 정신노동시대로의 전환과 맞물려
- ▲ 파리 최초의 카페
- ‘프로코프’의 간판
- 커피가 이처럼 전세계로 퍼져가게 된 기본 동인이 무엇일까?
아마도 커피가 근대 부르주아 문화와 내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 커피는 부르주아의 심성과 잘 어울리는 음료, 즉 이성적이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라 할 수 있다. 아침부터 맥주나 포도주를 마셔서 머리가 둔해진 수공업자, 혹은 어딘지 나른하고 에로틱한 분위기에서 코코아를
- 마시는 귀족들과 대비되는 도시 중산층 시민의 전형적인 기호품이 된 것이다.
- 17세기에 이미 커피 선전 문구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 ‘알코올이 드리운 안개 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인류는 커피의 도움으로 깨어나 시민적 각성과 근면성에 이르게 된다.’
- 말하자면 커피는 영국의 청교도주의, 혹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뒤에 가지고 있다.
- 중세의 육체노동자에서 근대의 정신노동자로의 전환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 영국의 커피하우스가 사업 장소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읽을 수 있다.
- 1687년 혹은 1688년에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가 런던의 타워스트리트(Tower street)에 ‘로이드의 커피하우스’라
- 이름 붙인 가게를 냈다가 이것이 롬바르드가(Lombard Street)로 옮겨져 약 80년 동안 번성했다.
- 이곳에는 선장, 선주, 상인, 보험회사 대리인 등 항해와 관련된 업자들이 많이 몰려와서 정보를 교환했는데,
- 이것이 후일 세계 최대의 보험 및 해운 사업체로 발전한 것이다.
:: 커피와 문화
부르주아 가정의 아늑함 상징… 산업발전에 따른 일종의 보상
- ▲ 커피나무
- 또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커피가 이처럼 근대 사회의 공적(公的) 영역에서만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사적(私的)
- 영역에서도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커피는 부르주아 가정의 아늑함을 보장해 주는 상징으로도 중요해졌다.
- 사업가들이 아침에 활기차게 일을 시작하기 위해 커피하우스에서 모닝커피를 마셨던 데 비해, 여성들은 오후의 커피
- 모임을 만들어서 다정하게 담화를 나누는 기회로 삼았다. 근대 사회는 냉철하고 타산적인 기업가들의 모임처럼 차가운
- 성격을 띠지만, 동시에 그런 측면을 완화시켜 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만큼이나 그에 대한 보상으로 ‘스위트 홈(sweet home)’이 강조되는 것이 그런 점을 가리킨다.
- 커피는 그 양쪽 세계 모두와
성공적으로 결합하는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파인과 길모어의 ‘고객체험의 경제학’에 나오는 분석에 따라 -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의 가격 구성을 살펴보자. 커피 한 잔에 들어가는 원재료로서 원두 가격은 고작 1~2센트에
- 불과하다. 이 원두를 잘 갈아서 포장한 다음 포장, 명칭, 가공법을 바꿔가며 제품화하여 팔면 값이 오르지만,
- 이때에도 한 컵 분량으로 보면 대개 5~25센트 정도이다.
- 이것을 가지고 일반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팔면 대개 1달러 정도로 가격이 오른다.
- 그런데 별 다섯 개짜리 고급 레스토랑이나 품위가 넘치는 카페에서 팔면 브랜드 값으로 대략 5달러까지 된다.
- 파인과 길모어는 커피가 가장 비싸게 팔리는 곳의 예로 베니스의 카페 플로리안의 커피 가격 15달러를 제시한다.
- 1센트와 15달러라는 큰 가격차를 만든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카페 플로리안에서는 단순히 커피라는 물질을 판매한
- 것이 아니라 문화를 가공하여 ‘체험’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우리가 커피라고 말할 때에는 단지 카페인과 같은 물질의
- 약리적 효과만이 아니라 이 물질과 내적으로 깊이 연관된
문화까지 포함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종교성으로부터 근대 부르주아 문화에 이르기까지 커피와 관련된 긴 궤적을 따라가 - 보았다. 커피는 이제 우리 삶에서 떼어내기 힘든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 한 잔의 커피 속에는 지구 위의 여러 문명들의 다양한
요소가 여릿여릿 녹아들어 있다.
- / 주경철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 석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네덜란드사 전공)
- ·현 서울대 인문대 서양사학과 부교수 ·‘문화로 읽는 세계사’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문명과 바다’ 등 저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