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10.09 최보식 선임기자)
누구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흡연자들이
골목에서 눈치 보며 담배를 피워야 하는 게 과연 정의인가
이들이 무슨 죄를 지었나
기획재정부 국감 때 박영선 의원이 "담뱃세는 쉽게 올리면서 재벌과 관련한 건 왜 봐주느냐"며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응시하며 57초간 침묵했던 게 화제였다. 박 의원은 인기 점수를 땄다.
하지만 담뱃세를 한낱 재벌 공격용 수단으로만 써먹은 것은 실례(失禮)였다.
담뱃세는 그 정도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
연초 담뱃값이 한 갑당 2000원씩 오르면서 세금이 3조원 이상 더 걷혔다.
국세청 합동조사반을 동원하는 수고도 없이 앉아서 거둔 성과였다.
담뱃값 인상의 명분은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담배를 덜 사 피우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선전한 만큼 담배 판매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당초 예상됐던 바였다. 정신 못 차리는 흡연자들 탓이 클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정부가 '세금 대박'을 맞았다는 점이다.
내년 담뱃세 예상 세수(稅收)는 12조6084억원. 이는 국세청이 연말에 전국의 연봉 1억원 이하 근로소득자로부터 거둬들일
세금과 비슷하다. 담뱃세 규모는 이자·배당 등에서 징수하는 금융소득세와 부동산 보유세보다도 더 커졌다.
서민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이렇게 정부 살림을 도와준다면 정부도 뭔가 국민 건강을 위해 일을 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이 있는 곳이 대한민국 금연 구역이다'는 표어를 내걸었다.
공공기관·음식점·커피점·호프집은 물론이고, 도심의 대형 빌딩치고 금연이 아닌 데가 없다.
한눈팔고 담배를 물면 과태료가 10만원이다.
왼쪽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글을 쓰던 걸 멋으로 여겼던 내 직장 풍경은 빛바랜 흑백 사진과도 같다.
이제는 게으른 신문 종사자들조차 어쩔 수 없이 건물을 나가 뒷골목이나 주차장 공간에서 한 대 피운다.
다른 직장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낮에 서울 중심부인 교보빌딩과 KT 건물 사이의 왕복 2차선 이면 차도에는
담배 피우러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로 혼잡할 정도다. 처음 보면 무슨 시위가 벌어진 줄 알 것이다.
퇴근 후에도 편안하게 한 대 피울 처지가 못 된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은 "잠깐 다녀오리다" 하면서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교대로 들락거린다.
음식점 출입문에 기대어 서서 한 대씩 피우고 오는 것이다.
얼마 전 금연 스티커가 부착된 음식점의 방에서 야당의 거물 정치인과 식사를 했을 때도 그랬다.
그는 "야당이 탄압받는데 한 번 봐주게. 창문 열고 한 대만 피우자"며 주인에게 사정했다.
담배 한 대를 피우려면 지위·연령의 고하(高下)나 체면을 따질 게 아니다.
담배는 안 피우는 게 현명하다. 제 돈을 써가며 건강을 해치는 짓이다.
법적으로는 기호 식품이라지만, 의학적으로는 '마약류'로 분류된다고 열변을 토하는 이들도 많다.
상대가 누구든 담뱃불을 붙이면 물을 끼얹는 금연 전도사도 있었다. 흡연자들은 이제 거의 설 자리가 없이 몰려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렇게 난리를 치는데도 여전히 담배와 작별 못한 숫자는 900만명쯤 된다.
이들의 존재를 마치 현실에서 없는 것처럼 누락시킬 수 있을까.
흡연은 국민 건강 차원의 문제도 있지만 개인의 취향과 자유에 해당하는 것이다.
청소년이라면 몰라도 자기 선택에 책임질 줄 아는 성인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실정법 위반이 아닌 이상 어느 선에서
멈춰야 한다. 몸에 해로운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런 바보짓을 하는 게 인간이다.
스트레스 해소, 심리적 안정, 창작 의욕 혹은 '그냥 심심풀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건강에는 육신의 건강 말고도 '정신'의 건강도 있는 법이다.
담뱃값에는 제조 원가와 유통 마진이 38%다. 나머지 62%가 세금이다.
정부는 흡연자들로 인해 전체 근로소득세와 맞먹는 세금 수입을 올렸다.
물론 흡연자들이 나중에 폐암 등에 걸려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더 까먹는다는 반론도 있지만,
현재로는 누구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이들이 골목에서 담배를 눈치 보며 피워야 하는 게 과연 정의인가.
그 겸연쩍은 표정들을 보면 연민이 생기지 않는가.
이들이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우리 곁에서 같이 일하고 귀가하면 저마다 가족의 일원인데도 말이다.
이왕 끊지 못한다면 인간의 품위를 지키며 당당하게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옳다.
담배 연기에 질색하는 사람이나 간접흡연의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게 담뱃세를 많이 거둬들인 정부의 의무다. 사방에 금연 구역만 표시하지 말고 흡연 구역도 정해줘야 한다.
그 공간에서라도 흡연자들이 납세자의 권리를 누리는 기분이 들도록 말이다.
무엇보다 흡연자들만을 위한 전용 카페나 음식점을 허용해줄 필요가 있다.
자욱한 오소리 굴이 되든 말든. 우리 사회가 이 정도는 수용할 만큼 성숙했다고 본다.
참고로 나는 흡연자가 아니다. 담배를 안 피운 지 20년이 넘었고 남의 담배 연기도 상당히 싫어한다.
'時事論壇 > 時流談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 물 부족 장기 대책 다듬고, 단기 비상계획도 세워야 (0) | 2015.10.12 |
---|---|
[동서남북] 어느 교육자의 하소연 (0) | 2015.10.11 |
[세상읽기] 박근혜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에 거는 기대 (0) | 2015.10.09 |
[취재일기] 동북아역사재단의 궤변 (0) | 2015.10.07 |
“한반도에 한사군” 왜곡된 고대사 자료 미 의회에 보냈다 (0) | 2015.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