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징비록』의 교훈을 또 잊었나

바람아님 2016. 2. 3. 00:35
[J플러스] 입력 2016.02.01 23:06

1590년 선조는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가 불안했다.

일본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서인인 황윤길과 동인인 김성일을 일본에 통신사로 보냈다. 그런데 일 년 뒤 똑 같은 걸 보고 온 두 사람은 정반대 보고를 올렸다.

서인 황윤길은 “일본의 군비가 놀라울 정도”라며 “토요토미의 관상이 예사롭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동인 김성일은 “토요토미는 생김새가 쥐새끼 같아서 대국을 칠 위인이 못 된다”고 일축했다.

안타깝게도 당시 조정의 권력은 동인 손에 있었다. 동인 세력은 일본의 침략보다 정권을 빼앗길까 더 겁냈다. 확실치도 않은 전쟁설을 퍼뜨렸다가 민란이라도 일어나는 건 아닐지 전전긍긍했다. 김성일도 일본의 위험성을 간파했지만 동인 정권의 이익 앞에 입을 닫았다.

그로부터 1년 뒤 조선은 왜군의 칼에 유린됐다. 선조는 땅을 쳤지만 소용 없었다. 물론 선조가 황윤길의 말을 들었던들 용빼는 재주가 있었을진 모른다.

 1월 수출 실적을 보면서 문득 류성룡의 『징비록』이 떠올랐다. 애초 올해 수출은 지난해보다 나을 것으로 예상됐다. 미국 경기가 살아나고 있어서다.

지난해 수출이 워낙 죽을 쑨 데 따른 기저효과도 기대됐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1월 수출은 18.5%나 곤두박질했다. 석유제품이 35.6% 감소한 것을 비롯해 수출주력 13개 품목이 몽땅 낙제 성적표를 냈다. 수출보다 수입이 더 가파르게 줄고 있다는 건 불길하기까지 하다.

한국은 원자재를 사다 중간재로 가공해 수출하는 나라다. 수입이 수출보다 더 빨리 줄고 있다는 건 앞으로도 수출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는 예고편이다.

 경기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경제가 맞고 있는 도전은 경기 사이클과는 다르다. 1992년 한·중 수교 후 한국 경제는 중국이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다.

98년 외환위기를 겪은 후 블랙홀의 구심력은 배가 됐다. 한국 제조업은 원재료를 사다 중간재로 가공해 중국에 수출하는 구조로 빠르게 재편됐다. 한국 수출의 25%는 중국으로 간다.

 그런데 중국이 성장 전략을 바꿨다. 그동안 수출 주도 성장의 후유증이 누적돼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수출 기지가 몰린 해안 대도시만 흥청망청해 내륙과의 양극화가 갈수록 벌어졌다.

농촌 청년은 대도시로만 몰렸다. 공해도 참을 수 없게 됐다. 여기다 눈덩이처럼 무역수지 흑자가 불어나자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견제가 거세졌다. 중국 정부가 수출 대신 내수로 성장전략을 바꾼 건 이 때문이다. 그 바람에 성장률이 뚝 떨어졌다. 지난해 중국 경제성장률은 25년 만에 7% 밑으로 주저앉았다.

 중국의 수출 엔진이 식자 정작 타격을 입은 건 한국 제조업이다. 1월 수출 실적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시적인 경기 침체가 아니라 중국과의 기존 분업구조가 깨지면서 생긴 후유증이란 얘기다. 더욱이 증상은 응급환자다. 수술을 서두르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

중국이 성장 전략을 바꾸지 않는 한 한국 제조업의 잔혹사는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과잉 설비는 서둘러 정리하고 중국의 내수를 겨냥해 사업구조도 재빨리 재편해야 한다.

기업활력제고특별법(원샷법)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노동개혁 4법의 통과가 급한 건 이 때문이다.

한데 더불어민주당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여야 원내대표의 원샷법 처리 합의를 단박에 깨버렸다. 같은 당의 김성수 대변인은 “원샷법이 하루 이틀 미뤄진다고 당장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박영선 의원은 “원샷법은 경제 살리기와는 무관한 대표적인 금수저를 위한 삼성특혜법”이라고도 했다.

물론 원샷법 처리가 몇 달 늦어진다고 한국 경제가 당장 결딴나는 건 아니다. 삼성은 원샷법 적용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1야당이 버티고 있는 한 19대 국회에선 어떤 법도 처리할 수 없다는 절망과 무력감이 줄 폐해는 깊이를 가늠키 어렵다.

행여 “우리는 안 돼”라는 냉소와 자조가 국민과 기업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는 건 아닌지 두렵다. 왜군의 칼끝을 두 눈으로 보고도 정권을 잃을까 입을 닫는 막장 드라마를 현실에서 보는 건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