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가까워지려는 욕망,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호기심을 품은 채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령 내가 장애를 가진 몸을 끌고 다니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곧장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남의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제 나는 홍대 친구와 약속이 있었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식당을 찾지 못해 한 시간 동안 길을 헤매고 말았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내 불완전한 신체에 관한 것뿐이었다. “저 사람 완전 취했나 봐.” “조심해, 가까이 가지 마.” “저 외국인 되게 이상하다.” 역시 일이 잘 안 풀릴 땐 철학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장땡이다.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은 자신의 결정에 달린 문제. 한 번의 미소, 한마디 말, 하나의 동작과 관심이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운 왕따일 수 있다니. 다행히 한 경찰관이 다가와 도와주었고, 10분 후 나는 맛있는 고기완자를 먹을 수 있었다. 그 친절한 경찰관을 떠올리는 내 마음도 고기완자처럼 따스했다.
하이데거는 집단의 횡포, 즉 끊임없이 남을 따라하면서 정해진 규범에 속하려는 태도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자기만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남의 것을 복사하는 행위. 나를 둘러싼 이들처럼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 그러는 와중에 하나의 틀이 형성되고, 그 틀에서 벗어나는 모든 사람을 배척하는 태도. 물론 무작정 독자성을 추구하고 주변 현실에 반하는 행동을 고집하는 것이 능사일 리는 없다. 그것은 똑같이 남의 시선에 얽매인 태도일 뿐이다. 정확히 거꾸로 된 의미로 말이다.
문제는 사회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찾고 거기서 빛을 발하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한국에 살면서 나는 그간 내 안에서 작동해온 몇 가지 사고방식을 새롭게 자각했다. 그중 하나는 세상의 중심에 있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가 항상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는 점이었다. 나의 하루, 내 아내, 내 자식, 내가 탈 기차 등등. 이렇게 나를 고집하다 보면 언젠가는 고립감에 휩싸이고, 깊은 외로움에 빠지기 마련이다. 우리 삶에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경고등과도 같다. ‘나’에 집착할수록 사람은 환멸과 실망, 고통에 시달린다. 결코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지적했듯이 각자의 특이성을 덮어버리는 ‘남’의 존재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나의 집, 내 아이보다 우리 집, 우리 아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가 나는 참 좋다. 그것은 세계관을 넓혀주고, ‘나’의 감옥문 빗장을 뜯어내 버린다. 그 활짝 열린 출구를 통해 우리는 자유와 평화, 선량함이 가득한 삶의 예술을 시도할 수 있다. 제일 잘나가는 최신형 휴대전화를 사려고, 요즘 핫하다는 신상 패션을 구하려고 상점가를 헤매지 않아도 된다.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에고의 변덕을 더 이상 좇을 필요가 없다. 대신 타인에게 마음으로 다가가, 아무도 배척하지 않는 ‘우리’로 살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언지 고민해 보자.
지금 당장 길에서 마주치는 헐벗은 이들을 향해 애정 어린 손길을 내밀어 보는 것은 어떤가. 타인이란 나의 자유를 가로막고 위협하는 존재가 결단코 아니다. 타인은 서로의 만남을 통해 온전한 ‘우리’를 발견케 해줄 환상의 기회 그 자체다. 대체 잃을 게 무언가. 인생은 어차피 한 편의 비극, 죽음이 그 대단원이다. 누구에게도 문 닫아걸지 말고 우리 모두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살자.
졸리앙 스위스 철학자 / 번역 성귀수
[중앙일보]
입력 2016.05.07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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