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디자인·건축

[일사일언] 간판과 현판

바람아님 2016. 6. 8. 07:12

(출처-조선일보 2016.06.08  탁현규 간송미술관 연구원)


탁현규 간송미술관 연구원도시인들은 집을 나서는 순간, 간판의 홍수에 시달린다. 이를 피해 다닐 도리가 없기 때문에 
도시인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공공디자인은 간판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간판을 내거는 이들은 내 것이 다른 간판들보다 크기에서나 색에서 눈에 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지, 다른 간판과 어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 구도심이건 뉴타운이건 
건물의 간판들은 자신을 쳐다봐 달라고 서로 아우성치며 눈을 어지럽힌다. 
이 혼잡함은 남보다 잘 보이고 싶은 이기심과 나만 밀릴 수 없다는 조바심, 
좋은 간판을 접하지 못했던 경험이 낳은 합작품이다.

최근 일부 건물에서 이런 간판을 다 같이 내리고 크기와 글자체가 모두 같은 네온 간판으로 바꾸고 있다. 
붕어빵 찍어내듯 똑같은 간판이 내걸린 모습을 보고 부조화(不調和)만큼이나 좋지 않은 것이 획일화(劃一化)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과잉 개성을 정리한 자리를 몰(沒)개성이 대신한 것이 안타까웠다. 
더 큰 문제는 이 방식이 이곳저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간판 교체가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간판 디자인을 낫게 할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모두 똑같이 바꾸면 된다고 쉽게 여겼기 때문이다. 
옛것을 하루아침에 부수고 새것을 뚝딱 하고 만드는 한국 특유의 법칙이 여기에도 작동했다. 
결국 무질서와 천편일률을 동시에 벗어날 방법은 간판을 주문한 사람과 디자인한 사람의 안목(眼目)이 다 같이 높아지는 
수밖에 없다. 안목을 높이려면 좋은 것을 많이 봐야 한다.

[일사일언] 간판과 현판
조선시대 궁궐, 정자, 누각, 서원, 사찰 건물의 현판만 보더라도 크기는 건물과 잘 어울리고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는 
정갈하며 테두리는 최소한의 장식으로 꾸몄다. 
한번 만들 때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정성껏 했기 때문에 화재로 타지 않는 한 몇백 년이 지나도 새로 바꿀 이유가 없었다. 
오랜 시간 살아남은 옛 미술을 통해 멋과 어울림이 무엇인지를 배운다면 건물 간판들도 더 이상 아우성치지 않고 
조화로운 소리를 울리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