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05.15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300’이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크세르크세스 1세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략하지만, 테르모필레 계곡을 지키던 단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과 힘겨운 전투를 벌이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다. 크세르세스의 대군이 정말 100만명이었고, 계곡을 방어하던 스파르타인들이 300명
뿐이었는지는 물론 알 수 없지만, 이런 전투가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왜곡은 상상을 초월한다. 빨간 팬티 하나만 입은 스파르타 병사들은
모두 아놀드 슈워제네거에 버금가는 빵빵한 근육을 가졌지만, 페르시아 병사들은 여성스럽고
약간은 변태 같다. 크세르세스 황제 역시 눈, 코, 귀를 피어싱한 변태 서커스 광대 같이 생겼다.
나치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 작품에 등장할 만한 스파르타 병사들이 “스파르타!!!”라고 외치며 돌격하면
수 천, 수 백 명의 페르시아 병사들은 장난감 군인 같이 쓰러져 버린다.
하지만 다시 한번 기억해보자. 페르시아는 서인도에서 이집트와 터키까지 지배하던 당시 최고의 슈퍼 파워였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인정하는 다문화 제국을 완성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장애인과 ‘나쁜’ 유전자를 가진 신생아를 버려버리는 전체주의 국가였다.
스파르타 영토의 원주민이었던 ‘헬로트’인들을 그들의 노예로 만들어 모든 농사와 일을 시켰다.
스파르타 청년들은 헬로트인 한 명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야만 진정한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다민족, 다문화 전통을 자랑하던 세계 최고의 슈퍼 파워 페르시아와 시골 변두리 전체주의 마을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인
스파르타의 전투. 어떻게 이것이 ‘300’이라는 영화에서와 같이 왜곡될 수 있었을까?
답은 단순하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가 쓰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점령하지 못했지만, 추후 알렉산더 황제는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렸다.
그리스의 역사는 그리스인들이 남겼다. 페르시아인들의 역사 역시 그리스인들이 남겼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남긴
페르시아의 역사는 그리스인들이 남기고 싶었던 페르시아 역사였지, 페르시아인들의 역사는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아케메네스 왕조 전문가인 프랑스 석학 피에르 브리엉트 교수가 2003년 프랑스에서 출간한
《알렉산더 그늘 아래의 다리우스 Darius in the shadow of Alexander》가 드디어 영어로 출간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다리우스. 그리스-로마, 그리고 유럽 역사, 그리고 유럽 역사를 고스란히 받아드린 일본,
그리고 일본 역사학을 그대로 가져온 우리나라에서의 해석은 간단하다.
마치 신 같은 알렉산더가 무능하고 퇴폐적인 다리우스 황제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알렉산더 모자이크’에서의 다리우스 황제는 두 눈을 크게 뜬 멍청한 겁쟁이일 뿐이다.
브리엉트는 질문한다.
지난 수 천 년 동안 알렉산더 황제의 그늘 아래 잊혀져 버린 다리우스. 그는 누구였을까?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이루기 위해 수 많은 병사와 친구들을 희생한 알렉산더.
반대로 포로가 된 사랑하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제국의 왕관을 포기하려 했던 다리우스.
우리가 진정으로 존경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잔인한 승자일까? 아니면 가정적인 패자일까?
피에르 브리앙트(Pierre Briant)
《Darius in the shadow of Alexander》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년 1월 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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