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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북스토리] 칼비노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 책이라는 우주

바람아님 2017. 3. 18. 21:53

(조선일보 2016.05.29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김대식의 북스토리] 칼비노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 책이라는 우주

우리는 언제부터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일까? 물론 ‘책’의 개념에 따라 답이 다를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우리는 찰흙, 대나무, 천 또는 돌에 글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은 운반하기도, 긴 내용을 기록하기에도 문제가 많았다. 


두루마리 형태의 종이 또는 양피지 ‘책’이 등장하며 드디어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실질적으로 읽고, 

또 읽을 수 있는 책이 가능해졌다. 플라톤의 대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유클리드의 수학. 

모두 두루마리 책으로 남겨졌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중간 내용을 읽기 위해서도 두루마리를 처음부터 새로 펼쳐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는 원하는 부분을 찾는 것조차 어렵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더구나 책이 너무 길어지면 두루마리가 두꺼워진다. 


결국 그리스-로마 시대 책들은 챕터당 하나의 두루마리로 나누었다. 

이런 책은 한 권을 운반하기 위해서 수 십 개의 두루마리들을 통에 담아야 한다. 

조용한 공원에서 나 홀로 책을 읽기 위해서는 무거운 ‘책통’을 짊어지고 동행하는 노예가 필수였다는 말이다. 


기원 후 1세기부터 사람들은 두루마리에 감긴 종이를 특정 길이로 접기 시작했고, 기원 후 2세기부터는 접힌 부분을 

칼로 자르고 실로 묶기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사용하는 ‘코덱스’(codex) 형태 책의 탄생이었다. 


2000년 가까이 사용되고 있는 코덱스. 컴퓨터와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을 가진 우리는 왜 여전히 실로 묶은 책을 

사용하고 있는 걸까? 


우선 책은 배터리가 필요 없다. 언제나 ‘켜 있고’, 인터넷도 필요 없다. 

원하는 페이지로 바로 이동할 수 있고, 무게도 가볍다. 

거기다 가격도 저렴하니 말 그대로 최고의 사용자 경험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책은 또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인간의 뇌가 몰입하기 가장 적절한 형태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책을 펴면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눈은 글을 읽지만, 뇌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읽는 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줄 수 있는 책. 


이탈로 칼비노《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는 인간에게 매일마다 새로운 우주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준 책을 찬양한다.

책을 좋아하는 주인공은 재미있는 소설책을 한 권 발견한다. 정말 흥미롭고 새로운 이야기. 

오랫 만에 세상을 잊고 글에 빠져 들어갈 수 있는 기회. 


[김대식의 북스토리] 칼비노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 책이라는 우주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한참 흥미진진해질 참에 내용이 다른 이야기로 변해버린다. 

아니, 책의 페이지들조차도 뒤죽박죽이다. 

이야기가 궁금해진 주인공은 서점에서 책을 찾지만, 이번에는 나머지 페이지들이 모두 비어있다. 


그 다음 이야기를 읽기 위해 세상을 모험하는 주인공. 칼비노의 책에서 주인공은 바로 ‘나’다. 

빨리 매서운 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이 와 나만의 세상에 빠져 읽고 싶은 그런 책이다.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2014, 민음사





주>> 코덱스 (codex) 

예전에, 서양에서 책을 만들던 방식의 하나. 

나무나 얇은 금속판을 끈이나 금속으로 묶어서 제본하였다.







[김대식의 북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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