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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성벽에서 인골 2구 출토…"신라시대에 사람을 제물로 묻었다는 증거"

바람아님 2017. 5. 17. 08:52

조선일보 : 2017.05.16 14:00

월성 서쪽 성벽에서 재물로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됐다.
/문화재청

신라의 천년 왕성인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성벽에서 약 1500년 전 제물로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출토됐다. 토우(흙으로 빚은 사람 형상의 인형)와 간지가 적힌 목간도 함께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월성 발굴조사 결과,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워 있는 인골 1구와 얼굴과 팔이 이 인골을 향해 있는 또 다른 인골 1구를 발견했다고 16일 밝혔다. 연구소는 지난해 3월부터 월성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5세기 전후 월성 서쪽의 성벽 축조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흔적이 발견된 것은 국내 최초다. 이는 제방을 쌓거나 건물을 지을 때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매장하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인주(人柱) 설화가 허구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연구소는 인골의 얼굴 주변에서 나무껍질이 부분적으로 확인됐고 두 인골이 결박이나 저항의 흔적 없이 곧게 누운 점 등으로 볼 때 사망한 뒤에 묻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기원전 1600~1000년쯤 중국 상나라에서는 주거지나 성벽 건축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쓰는 풍속이 유행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사’에 충혜왕 4년(1343)에 ‘왕이 민가의 아이를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라는 유언비어가 항간에 돌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월성 해자에서 나온 다양한 모양의 토우./문화재청

이와 함께 경주 월성의 북쪽 해자에서는 독특한 모양의 토우와 월성의 역사적 가치를 입증하는 목간도 나왔다.

이번에 발견된 토우의 모양은 사람과 동물, 말을 탄 사람 등으로 다양하다.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허리가 꼭 맞아 신체 윤곽선이 드러나는 모양의 이슬람 문화권 셔츠 양식의 상의를 입고 있는 토우도 발견됐다. 연구소는 “발견된 토우는 6세기 경 것으로 추정된다”며 “당나라 시대 호복(胡服)이라고 불린 소그드인의 옷과 모양이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하는 현 이란계 주민이다.

월성 해자에서 새롭게 발굴된 목간은 모두 7점이다. 그중 한 목간에서는 '병오년'(丙午年)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는데, 작성 시점은 법흥왕 13년(526) 혹은 진평왕 8년(586)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목간에서는 경주가 아닌 지역 주민에게 주어진 관직인 '일벌'(一伐)과 '간지'(干支), 노동을 뜻하는 '공'(功) 자가 함께 기록돼 있었다. 이에 대해 연구소는 “당시 왕경 정비 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됐고, 이들을 지역 유력자가 감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아뢰고'의 이두식 표현인 '백견'(白遣)이 적힌 목간,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는 관직명인 '전중대등'(典中大等)이라는 글자가 쓰인 목간도 나왔다.

이외에도 월성 해자에서는 동물뼈, 식물유체, 목제유물 등 다양한 자료들도 발견됐다. 동물뼈는 돼지, 소, 말, 개가 가장 많았고, 곰 뼈도 발견됐다. 신라 시대 유적에서 곰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식물유체는 식물의 줄기와 잎, 열매, 씨앗 등이 나왔다. 산림청이 희귀식물로 지정한 가시연꽃의 씨앗이 가장 많았다. 손칼과 작은 톱 등으로 정교하게 만든 얼레빗도 발견됐다.

이처럼 다양한 유물이 나온 해자는 5∼7세기와 8세기 이후의 건축 기법이 다소 다르지만, 500년 동안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주 월성은 제5대 파사왕 22년(101) 축성을 시작했으며, 신라가 망한 935년까지 궁성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