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지상의 처음이자 마지막 처소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후 근대 사회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을 만들어내는 동안 제도와 시스템의 노예였던 인간들은 천부(天賦)의 인권을 가진 존재로 거듭 태어났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체로서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향유할 수 있게 됐으며, 사회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체제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게 됐다. 그렇게 해방된 ‘개인’들이 모여 근대적 ‘개인주의’를 만들어냈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온 세계를 활보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인간 해방’은 과거엔 없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공공 영역의 약화와 가정의 사유화다.
공동체가 살아 있던 사회에서 가정은 늘 타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옆집의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알던 시대가 그런 시대다. 한 집안의 경사는 마을 전체의 경사였고, 한 집안에서 일어나는 만행(蠻行)은 온 마을의 비난의 대상이 됐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비(非)사회적 개인들과 비사회적 가정이 양산되면서 공간상의 ‘옆집’도 이제는 ‘부재(不在)의 집’이 돼 버렸다. 옆집에서 누가 굶어죽어도, 어린아이가 개 목줄에 묶여 있어도 사정을 알 도리가 없다. 사생활이 범죄의 형태로 외부에 노출되기 직전까지 가정은 무법천지, 정의 대신 폭력이 지배하는 공간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과도하게 사유화된 가정들, 공적 담론의 세계와 단절된 가정들을 지배하는 것은 ‘사유화된 법’이다. 사유화된 법은 ‘공의(公義)’의 원칙을 무시하므로 자의적이다. 한마디로 말해 ‘제멋대로’인 것이다. 이런 가정 안에서 가족의 구성원들은 아무런 통제도 없이 각자 자신의 권력 크기에 따라 다른 가족들에게 자신의 사적인 ‘취향’들을 ‘당위’의 형태로 강요한다. 몇 년 전 “엄마가 원하는 학교에 못 가서” 투신자살한 한 고등학생의 이야기가 보도된 적이 있다. 이 학생에게 강요된 ‘학교’는 ‘당위’가 아니라 엄마의 ‘취향’이었다. 엄마의 지극히 사적인 욕심이 자식을 죽인 것이다. 공적 담론이 차단된 가정에서 상식이 무너지고 합리적 사유가 설 자리를 잃는다. 분란이 일어나고 통제 불가능한 언어·물리적 폭력이 난무한다. 가정사이니 아무나 끼어들기도 힘들다.
이렇게 사유화의 강도가 높은 공간일수록 ‘억견(臆見·doxa)’이 지배할 가능성도 커진다. 사유화된 공간은 개성과 차이를 생산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편견과 무법·폭력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는 공간이다. 그리하여 사유화된 공간의 건강성은 공적인 담론의 세계와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연결돼 있는가에 달려 있다. 관계 지향적이고 타자 지향적인 개인이 모여 이루는 가정이야말로 건강한 가정이다. 타자성이 희석되고 사유화만 깊어질 때 많은 사람이 가장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할 가정에서 가장 무시당하며 가장 큰 상처를, 가장 자주 받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정을 ‘집구석’이라고 호명하는 것이다. 가정이야말로 ‘내 멋대로’의 공간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페어플레이가 필요하다. 가정은 누구에게나 지상의 처음이며 또한 마지막인 처소이기 때문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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