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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46] 황홀한 봄은 금세 가고, 꽃향기는 쉬 스러지나니 페이스북 트위터 구

바람아님 2013. 11. 13. 16:51

(출처-조선일보 2013.03.07 손철주 미술평론가)

 
꽃 사랑도 지나치면 밉보인다. 이를테면 두보 같은 대시인의 탄식이 그렇다.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은 깎이는데/   
            바람에 만 점 흩날리니 진정 시름겹구나.' 
시구로야 더할 나위 없는 절창인데, 되뇌어보면 어떤가. 낫살 든 자의 엄살기가 슬며시 묻어난다. 
송나라 문인 왕안석의 토로는 더 안쓰럽다. 
            '땅을 쓸고 꽃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건/   
           그 꽃잎 먼지 묻을까 애처로워서라네.' 
아끼는 마음도 유만부동(類萬不同), 이 정도면 속이 간지러워진다.


'포동춘지(浦洞春池)' - 이유신 그림, 종이에 담채, 30×35.5㎝, 

19세기, 개인 소장. 위 사진은 가운데 부분 확대.


멀쩡한 사내들이 왜 봄날의 꽃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해댈까. 
아무려나, 다 봄이 짧은 탓인데 어쩌겠는가. 봄은 짧아서 황홀하고 황홀해서 훅 간다. 꽃인들 다르랴. 열흘 붉기가 어려울 때, 꽃은 서글피 아름답다. 꽃구경에는 남녀 안 따진다. 
지금 이 여덟 남자를 보라. 저들끼리 무리지어 새싹을 밟으러 나왔다. 그림 오른쪽에 '포동춘지(浦洞春池)'라는 제목이 보인다. 성균관 서북쪽에 있던 포동은 개울이 흘러 '갯골'로 불렸는데, 지금 서울의 명륜동 어름이다. 이웃하던 송동(宋洞)과 함께 갯골은 봄날에 꽃구경, 여름날에 물놀이로 왁자했다.

갯골은 복사꽃과 살구꽃이 많았다. 다닥다닥 서 있는 꼴로 보면 그림 속의 꽃은 복사꽃이다. 
누워서 보고 서서 보니 봄맞이는 한갓지고 못에 어룽진 물풀은 나른하다. 하여도 꽃 멀미는 못 말린다. 
술에 취하고 향기에 취해 눈이 어질한데, 한나절을 비껴가는 노을이 꽃가지에서 출렁거린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천원(泉源)'이란 사람이 그림에 시 한 수를 부쳤다. 
      물 맑은 포동의 개울           (水淸浦洞漵)
      꽃 향기로운 포동의 노을     (花香浦洞霞) 
      시 지으며 술 마시는 풀밭    (詩樽芳艸上) 
      물을 보다 다시 꽃을 보네    (看水又看花)

그린 이는 조선 후기를 살다 갔으나 남은 행적이 드문 이유신(李維新)이다. 그는 촉촉한 붓질에 맑은 색감을 잘 우려낸 화가다. 봄은 곧 가고 꽃은 쉬 진다. 옷자락에 꽃향기 나눌 친구가 그립다고? 서둘러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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