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3.04.24 손철주 미술평론가)
버들가지에 물오른 봄날이다. 허투루 쌓은 돌담 사이로 문짝을 열어놓고 주인장은 못에 들어가 말을 씻는다. 아랫것들 시켜도 될 궂은일인데, 주인이 내켜 말고삐를 잡았다. 날이 따스워진 까닭이다. 팔 걷어붙이고 다리통까지 드러냈지만 체면에 상툿바람은 민망했던지 탕건을 썼다. 말의 표정이 재미있다. 눈은 초승달이고 콧구멍은 벌름댄다. 입도 안 벌리고 웃는 모양새다. 솔로 등을 문질러주자 녀석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린 이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이고, 제목은 '세마도(洗馬圖)'다.
'세마도'… 김홍도 그림, 18세기, 종이에 담채, 22.0×31.8㎝, 개인 소장.
작은 그림이지만 서려 있는 봄볕이 푸지다. 봄바람은 부드럽다 못해 간지럽다. 버들은 살랑살랑, 못물은 욜랑욜랑, 말꼬리는 나달거린다. 구도에 어울리지 않게 단원의 글씨가 큼지막해진 것은 괜히 춘흥에 겨워서다. 무슨 내용인가.
'문밖의 푸른 못물로 봄날에 말을 씻고 門外碧潭春洗馬(문외벽담춘세마)
누대 앞의 붉은 촛불은 밤에 손님을 맞는다. 樓前紅燭夜迎人(누전홍촉야영인)'
당나라 한굉(韓 ?)의 시에서 빌려온 구절이다. 부귀와 공명을 버린 채 한소(閑素)하게 사는 자의 여유를 노래한 이 대목은 어찌나 유명했던지 한굉 말고도 여러 시인이 한두 자씩 바꿔가며 읊어댔다. 단원 또한 얽매임 없이 살고 싶던 화가였다. 그에 딱 맞는 소재를 고른 셈이라 붓질이 그저 사랑옵다.
봄은 버드나무와 사귄다. 돌이켜보라, 노랫가락에 '봄버들'이 좀 자주 나오는가. 단원도 버들을 되우 멋들어지게 묘사했다. 비스듬히 굽은 둥치는 무겁고, 빗방울처럼 톡톡 떨어지는 잎은 가볍다. 버들잎이 하도 예뻐 당나라 시인 하지장(賀知章)은 일찌감치 감탄했다.
'가는 잎사귀 누가 마름했는지 몰라라/ 아마도 2월의 봄바람이 가위질했겠지.'
하여도 야속한 것이 봄 아니던가. 실버들이 천만사(千萬絲)라도 가는 봄을 묶지 못한다. 솔질하는 저 사내의 느긋함이 부러울 따름이다. 봄날은 가도 그는 안분(安分)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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