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기후변화협약 총회에 참석하러 폴란드 카토비체에 갔다가 잠시 시간을 내어 인근에 있는 아우슈비츠를 찾았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관해서는 일찍이 학교에서도 배웠고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도 많이 접한 터라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투어에 임했다. 하지만 그곳은 그 어떤 마음의 준비도 소용없는 곳이었다.
몇 년 전에 가본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이제 와 생각하니 너무 잔잔하다. 어떤 아픔인지조차 모르는 우리 마음을 그저 다독일 뿐이다. 스필버그의 작품이라 믿고 본 영화 '쉰들러 리스트'도 가서 보니 겨우 수박 겉을 핥았을 따름이다. 어려서 읽은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차라리 낭만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참혹함의 정도는 상상 그 이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수용소 시설은 요사이 우리가 개선하고자 목청을 높이고 있는 닭이나 돼지의 사육 시설보다 나을 게 전혀 없어 보였다. 어떤 면으로는 유태인보다 더 천대받은 러시아 포로들은 종종 좁디 좁은 방에 갇혀 선 채로 잠을 자야 했다. 어느 어두컴컴한 전시관에는 직물 재료로 사용하려고 잘라둔 머리카락 뭉치가 눈이 모자라게 쌓여 있었다.
인간의 생명을 참을 수 없으리만치 가벼이 여긴 아우슈비츠를 떠나며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귀국해보니 수능 시험을 마치고 펜션에 놀러갔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고등학생 3명의 소식이 나를 맞이한다. 가스실에서 희생된 사람만 줄잡아 100만명이 넘는 아우슈비츠의 여운과 묘하게 겹치며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늘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다. 동물행동학자로서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 관해 논문을 쓸 때면 너무도 단정적으로 그들의 행동과 품성을 기술하곤 했다. 까치는 이렇고 긴팔원숭이는 저렇고. 하지만 예수와 히틀러가 양립하는 인간은 참으로 기이한 동물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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