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9.01.24. 00:15
한국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져
한·미, 민주주의·인권·정의 등
같은 가치로 함께 가길 원해
10년 전 가을 제가 주한 미국 대사로 인천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저를 기다리던 기자들에게 했던 첫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소개를 할 계획은 없었는데 이 인사말이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나왔습니다. 한국 언론은 제가 1970년대 충청남도에서 평화봉사단 자원봉사자로 일하던 당시 주위 사람들이 저에게 심은경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사연이 신문에 소개되면서 많은 한국인이 저를 심은경으로 기억해 줬습니다.
저는 2011년 말 주한 대사직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한국에 오면 길거리나 음식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살짝 저를 알아보는 듯한 표정을 먼저 짓곤 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기억해낸 뒤 마침내 “심은경 대사 아니에요?”라고 제게 말을 걸어오기도 합니다. 이런 인사말은 “전 주한 미국 대사 아니에요?”란 말보다 훨씬 정감 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중앙일보 이하경 주필이 ‘심은경의 미국에서 본 한국’이란 제목의 고정 칼럼을 써달라고 제안했을 때 저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 훌륭한 제목이라 생각했고 기뻤습니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국인들과 함께 나눠온 우정, 한·미 양국의 유대, 그리고 인생에 대한 솔직한 대화를 이어가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세계적 역할이 다양한 나라이지만 때로는 속 좁은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상식과 관심이 부족한 데 대해 오랫동안 한탄해 왔습니다. 당연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달라졌습니다. 미국 내 한인 사회의 커지는 규모와 영향력, 하늘을 찌를 듯한 K팝 가수들의 인기로 증명된 한국의 소프트 파워, 그리고 한국이 수 십 년간 미국 기관들의 한국 관련 연구에 쏟아부은 투자가 결실을 보고 있습니다. ‘Kimchi’와 ‘gochujang’(정확히 이런 철자로 적혀 있습니다)은 ‘pizza’가 백 년 전 그러했듯이 미국 영어사전에 당당히 등재됐고 보편화되는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 남북대화는 깊어졌지만 북·미 대화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북한 비핵화에 대한 낙관이나 비관과는 상관없이 올해 남북과 주변국, 그리고 한·미 동맹 관계는 중요한 시기에 접어들었음이 확실합니다.
저는 남북관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직감합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직접 비핵화 약속을 하려는 김정은 위원장의 준비된 자세, 문 대통령의 방북 당시 열린 전례 없는 공개 행사에서 변화를 감지했습니다. 수십 년간 한국을 미국의 괴뢰국으로 비하하던 북한의 노력이 종식된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가 생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의 경제·정치적 성공이 있습니다. 문 대통령이 미국과 입장을 맞추면서 더 새롭고 중추적인 역할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이 새로운 남북관계가 한·미 동맹에 미치는 영향을 포함한 여러 위험들에 대해 한국에서 많은 논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북한의 의도 가운데 분별해야 할 부분이 많고, 북한의 행동을 구체화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변덕스러운 미국 대통령에 대해서도 아마 똑같은 말이 나올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관계나 외교에서 전통적 관념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이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비핵화, 평화 프로세스, 경제 발전 등 외교의 다양한 요소를 조율하고 순서를 짜는 임무가 중요합니다. 미국은 한국이 앞으로 더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될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긴밀히 협력해야 합니다.
한국과 미국의 군인들은 양국의 끈끈한 동맹을 염두에 두고 이런 건배사를 하곤 했습니다. 미군들이 “같이 갑시다”라고 하면 한국 군인들은 “We go together”(우리는 함께 간다)라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한·미 동맹은 민주주의·인권·정의·평등 등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들을 중심에 둘 것입니다. 이런 가치들이 위협받고 있을 때도 우리는 그 가치들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동맹의 회복력과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중앙일보에 쓰게 될 칼럼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모두에게 보내는 제 신년 건배사는 “같은 가치로 갑시다”입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人文,社會科學 > 時事·常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튼, 주말] 예술가는 뭐가 매력인거죠, 언니들? (0) | 2019.01.27 |
---|---|
로스차일드家, 200년의 오스트리아 '애증의 역사' 마감 (0) | 2019.01.26 |
[임용한의 전쟁史]〈42〉맥아더보다 니미츠 (0) | 2019.01.23 |
[윤희영의 News English] "당신 자신을 위해 용서하라" (0) | 2019.01.22 |
[아무튼, 주말] '알함브라…' '포켓몬GO'라는 동전의 양면 (0) | 2019.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