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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알함브라…' '포켓몬GO'라는 동전의 양면

바람아님 2019. 1. 20. 10:55


[아무튼, 주말]

'알함브라…' '포켓몬GO'라는 동전의 양면


(조선일보 2019.01.19 어수웅·주말뉴스부장)


[魚友야담]


어수웅·주말뉴스부장어수웅·주말뉴스부장


20년 전 한 장편소설의 리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제목은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김민영씨가 군의관 시절 쓴 6권짜리

게임판타지로,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과 현실 세계를 혼동하며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도전적 작품이었죠. 옥스타칼니스는 VR의 초기 경전 역할을 했던 '실리콘 미라지'의 저자.

소설 흡인력도 대단했지만, 실제 구현 가능한 VR 기술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는 점이

획기적이었습니다.


요즘은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즐겨 봅니다.

시간여행 미스터리 '나인'을 쓴 송재정 작가에 대한 신뢰로 시작했는데, 정교한 설계에 감탄하며 주말에 '정주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드라마의 핵심 장치는 VR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는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

2 년 전,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포켓몬 포획한다고 뛰어다니던 사람들 기억하시나요?

포켓몬GO. 그게 AR 게임이었죠. 이번 '알함브라…'에서는 그보다 훨씬 진화된 게임이 등장합니다.

그 놀라운 게임으로 돈을 벌려는 투자회사 대표가 현빈. 20년 전 소설처럼 이번 드라마에서도 현실과 게임이 포개지고

갈라지면서 살인이 발생합니다. 분명히 게임 속 결투였는데, 실제로도 상대가 죽어버린 거죠.

현빈은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스마트 렌즈를 착용하고 미친 듯 양쪽 세계를 왕복합니다.

실제로 VR과 AR 기술은 어느 수준까지 와 있을까요.

어마어마한 돈이 걸린 비즈니스라, 최신 기술은 영미권 기자들도 비밀 유지 서약서를 쓰고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는군요.

최근 '미래는 와있다'(더난刊)를 쓴 '와이어드'의 편집장 피터 루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회전하는 행성들 사이를 걸었고, 우주 전함의 격전을 치렀고, 손바닥에 야생 동물을 올려놨고,

로봇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우리는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종종 두려워합니다. 새로운 기술이 주는 공포죠.

하지만 루빈 말대로 미래가 이미 와 있는 것이라면, 좀 더 밝은 쪽으로 이끌어야 할 겁니다.

희망적인 에피소드 하나. 최근 엄마를 사랑하는 한 도쿄 젊은이의 고백을 읽었습니다.

"빚을 지고, 월급을 차압당하고, 인터넷 게임에 빠져도 파친코는 그만두지 못하던 엄마가,

포켓몬GO를 시작하고 나서 거의 파친코에 가지 않습니다.

매주 50㎞ 걷는 효과까지. 누가 이런 전개를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아무튼, 주말]

이제 광고는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이 되었다

  
(조선일보 2019.01.12 어수웅·주말뉴스부장)


[魚友야담]


을지로 골목에 숨은 옛날 다방에서 '점잖은' 2019년 달력을 봤습니다.

흔히 '주류 도매상 달력'이라 쓰고, '헐벗은 달력'이라 읽는. 페미니즘 열풍 때문이건, 교양과 세련의 향상 덕분이건,

반라(半裸) 혹은 전라(全裸) 차림의 여성들은 거기 없더군요.

대신 따뜻하게 차려입은 주인공들이 의젓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탓인지 덕인지 시선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우리 일행은 그 달력 광고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죠.

현혹되지 않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다 문득 뉴욕대 경영대학원 스콧 갤러웨이 교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광고는 정액제를 사용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 내는 세금이 되었다."


주류 도매상 달력에서 유튜브나 넷플릭스로의 비약이 느닷없기는 하지만, 요즘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광고와 인내심의 함수관계 같은. "15초 뒤에 광고를 건너뛸 수 있습니다."

보고 싶은 영상을 무료로 보려면 15초의 광고를 견뎌야 하는 것이죠. 반면 유튜브 레드나 넷플릭스는 자유롭습니다.

한 달 얼마의 정액을 내면 광고에서 해방되니까요.

전에는 무료라 참았던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는 인간의 주의 집중이야말로 가장 희소한 자원이니까요.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지배하는 시대, 우리는 겨우 10분의 집중도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보았던 에마 스톤 주연의 10부작 넷플릭스 SF 드라마 '매니악'에는 이런 설정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도 얼마든지 공짜로 한 끼 밥과 지하철 탑승과 술 한 잔을 얻을 수 있는 세상.

하지만 그는 대가로 애드 버디(ad buddy)를 불러야 하죠. 직역하면 '광고 친구'라고 할까요.

돈은 없어도 되지만 라면 한 그릇을 먹는 동안 내내 옆 자리에 앉은 애드 버디에게 특정 상품 광고를 들어야 합니다.

지하철로 광화문에서 왕십리까지 이동한다면 그 시간 내내 옆 좌석에 광고맨을 앉혀야 하죠.

참으로 무시무시한 대가 아닙니까.


을지로 옛날 다방에서 너무 멀리 와 버렸군요. 다시 한 번 인간의 주의 집중이야말로 가장 희소한 가치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스스로 시간의 주인이 되는 한 주일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