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01.03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전쟁은 日이 일으키고 분단은 우리가 당한 꼬인 近代史
'통일 독일'의 강력한 리더십은 '전범' 책임 잘 짊어졌기에
우리도 나누어진 상처 성숙하게 견뎌내야 기회 얻을 수 있어
결국 마지막 30페이지를 앞두고 포기했다.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한 해에 책 두 권은 번역하기로 맘먹었다.
간단한 심리학 책 한 권을 번역하고 나니 좀 더 어려운 책을 번역할 욕심이 생겼다.
과감하게 헤겔미학과 동양미학의 관계를 모색하는 철학책을 선택했다.
아, 그러나 의욕이 과했다. 내용은 둘째치고 저자의 문장이 도무지 참기 어렵게 꼬여 있다.
이런 식이다. '広く人の心を打つものとなっ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 그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이런 식이다. '広く人の心を打つものとなっ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 그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널리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문맥상 그냥 '널리 사람들 마음을 움직인다' 하면 된다. 도대체 뒤쪽 문장은 왜 썼는지 모르겠다.
저자의 모든 문장이 이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의견을 분명히 하지 않으려는 까닭이다(이런 식의 못된 문장은 한국의 학술 논문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이 저자가 유별나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은 상당히 두려운 일이다.
'두려움'은 일본의 집단심리학적 특징이다. 일본인이 친절한 이유도 두렵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려움'은 일본의 집단심리학적 특징이다. 일본인이 친절한 이유도 두렵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해진 룰 안에서만 친절하기 때문이다. 그 틀을 벗어나면 태도가 돌변한다.
일본에서는 친절도 상호작용의 규칙 같은 거다. 규칙을 어겼을 때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친절하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생각하는 친절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
'두려움'이라는 일본의 집단심리학적 특징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아무 때나 칼을 뽑았던 '사무라이' 이야기를 한다.
'두려움'이라는 일본의 집단심리학적 특징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아무 때나 칼을 뽑았던 '사무라이'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사무라이 환원론'은 이제 많이 진부하다.
언제 적 사무라이인가? 일본의 꼬인 근대사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근대적 국가 형태를 갖췄지만 신화적 천황제를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패전이라는 천황제 폐기의 유일한 기회를 놓친 것도 한 원인이다.
그래서 '일본인은 누구인가?'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에 관한 책이 일본에 그렇게 많은 거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일본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관해 가장 많이 고민하는 나라다. 시도 때도 없는 '일본론' '일본인론'이 난무한다.
일본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관해 가장 많이 고민하는 나라다. 시도 때도 없는 '일본론' '일본인론'이 난무한다.
정체성 혼란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에서부터 시작된 정체성 혼란은 동아시아의 일원이기를 거부하는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바로 여기에 '두려움'이라는 현대 일본 집단심리학의 특징이 근거하는 것이다.
뜬금없이 오케스트라 지휘자나 입는 연미복을 입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아베의 엄숙한 표정은
정체성 혼란에 따른 뿌리 깊은 두려움의 표현일 따름이다.
'두려움'이 일본의 집단심리학적 특징이라면 한국의 집단심리학적 특징은 무엇일까? '분노'다.
'두려움'이 일본의 집단심리학적 특징이라면 한국의 집단심리학적 특징은 무엇일까? '분노'다.
근대 이후 식민지, 전쟁, 가난, 독재 시절을 겪으며 집단무의식 깊숙이 가라앉은 '분노'와 '적개심'이다.
'분노'와 '적개심'은 억눌린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저항 수단이다. 때로는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
고통스러웠던 시절의 분노와 적개심이 '한'으로 응어리져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70년 가까이 되어간다.
여야가 바꿔가며 정권을 잡는 형식적 민주주의도 이뤄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압축 성장에 따른 빈부 격차 문제가 심각하지만, '분노'와 '적개심'만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사회는 더 이상 아니다.
그런데도 왜 거리에는 분노와 적개심이 넘쳐나는 것일까?
왜 이토록 쉽게 '내 편' '네 편'이 나뉠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왜 이렇게 간단히 '죽일 놈'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 /김정운 그림
'분단' 때문이다. 분노와 적개심이라는 한국인의 낡은 집단심리학적 상처는 이 말도 안 되게 황당한 분단 상황 때문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우리 편' 아니면 바로 '적'이라는 분단의 이분법이 한국인들의 인지적 셰마로 굳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이 뿌리 깊은 집단심리학적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통일은 꼭 되어야 한다.
통일된 독일을 살펴보니 분단의 상처는 분단의 시간만큼이 지나야 치료된다.
70년 분단 시간을 보냈으면 또 다른 70년이 지나야 심리적 상처까지 아문 진정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많이 억울한 생각이 갑자기 든다.
원래는 일본이 분단되었어야 옳기 때문이다.
전쟁의 책임으로 독일이 동서로 나뉘었듯이, 일본도 동쪽 섬 두 개, 서쪽 섬 두 개로 나뉘었어야 옳다.
일본은 큰 섬이 4개라 나누기도 아주 편하다.
전쟁은 일본이 일으키고, 그 죄과는 우리가 뒤집어쓴 꼴이다.
전쟁은 일본이 일으키고, 그 죄과는 우리가 뒤집어쓴 꼴이다.
그래서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태도가 여태 저 모양인 거다.
일본이 전쟁 책임을 안고 독일처럼 분단되었더라면,
지금처럼 가해자였음을 새까맣게 잊고 '원폭 피해자' 시늉만은 안 했을 것이다.
그 분단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주변국들에 끼친 그 사악함을 끊임없이 성찰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도덕적으로 무시당하는 나라'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통일된 독일이 유럽연합을 주도적으로 이뤄내고,
통일된 독일이 유럽연합을 주도적으로 이뤄내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분단의 상처를 성숙하게 견뎌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분단이야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분단의 상처를 자기 파괴적 분노와 적개심으로 풀어내려 해서는 안 된다.
이 고통의 시기를 창조적으로 견뎌내야 우리에게도 새로운 리더십의 기회가 온다.
아무튼, 갓 서른 청년이 아무리 용을 써도 그 황당한 시스템을 지금처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튼, 갓 서른 청년이 아무리 용을 써도 그 황당한 시스템을 지금처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구멍가게도 그런 식으로 아들이 이어받으면 바로 망한다.
통일은 새벽 도둑처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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