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설왕설래] 화이트칼라

바람아님 2016. 5. 10. 00:25
세계일보 2016.05.09. 18:00

하얀 와이셔츠에 진한 넥타이.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패션이다. 특별한 화이트칼라가 있었다. 서류 가방을 들고 세계를 누빈 사람들. ‘수출 첨병’이라고 불렀다. 전문 지식과 외국어로 무장한 그들은 1970∼90년대 세계시장의 판도를 바꾼다.

일본 경제를 일으킨 종합상사들. 일본에서는 “화이트칼라야말로 경제를 부흥시킨 주역”이라고 한다. 그들은 부를 축적했을까. 그러지 못하다. ‘부자 기업, 가난한 월급쟁이’는 공식처럼 굳어 있지 않은가.


이런 일본 사회의 구조는 어디에 기인한 걸까. 강항이 선조에게 올린 ‘적중봉소(賊中奉疎)’에서 일말을 들여다보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권력을 움켜쥔 도요토미 히데요시. 토지를 모조리 빼앗아 부하들에게 나누어 줬다고 한다. 세금도 엄청 걷었다. 강항은 이렇게 적었다. “논밭에서 나는 것이라면 꺼풀 한 오라기 남겨 두지 않았으니 장군들 배는 나날이 부르고, 농민의 독은 언제나 텅 빌 뿐이다.” “한 뼘, 한 오라기 땅도 벼슬아치 소유 아닌 땅이 없다.” 일본의 가난한 월급쟁이는 이런 전통을 잇고 있는 걸까.


그들의 인내력이 대단했다. 일벌레로 낙인찍힌 일본의 샐러리맨. 서구인은 “노예처럼 일한다”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가슴 한쪽에는 황화(黃禍)의 두려움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

그 뒤를 좇은 한국의 화이트칼라는 더 했다. 1980년대만 해도 최고의 직장으로 꼽힌 우리나라 종합상사들. 불이 꺼지는 법이 없었다. 서류 가방을 끼고 ‘열사의 땅’ 중동, 남미 오지까지 누볐다. 폐허에서 일어나 “이제 일본과 싸워 볼 만하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으니 그동안 우리의 화이트칼라가 흘린 피땀은 얼마나 흥건할까. 그들이야말로 수출 대국을 일으킨 역군이다.


화이트칼라가 무너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일본에서 나오는 소리, “경제재건의 영웅이던 샐러리맨이 경제회생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연공서열·종신고용을 깨기 위한 노동개혁이 화이트칼라의 벽에 부딪히고 있기에 나오는 소리다. 실직의 공포도 밀려든다. 우리나라는 더하다. 지난해 금융권에서 사라진 일자리 1800여개. 모두 화이트칼라가 떠난 자리다.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이 시작되니 “화이트칼라부터 정리한다”는 말이 나온다. 눈물 머금을 화이트칼라가 곳곳에 생겨날 판이다.


역사는 정·반·합의 법칙에 따라 변전한다고 했던가. 하기야 영원한 정(正)이 어디 있겠는가. 정이 합을 넘어 반으로 변하니 화이트칼라의 소명도 다하는 것일까. “초상지풍필언(草上之風必偃).” 거센 바람이 부니 풀은 쓰러질 수밖에 없는 법인가.


강호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