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日本消息

[데스크에서] 日王과 아베

바람아님 2016. 9. 5. 23:58

조선일보 : 2016.09.05 03:04

최원석 국제부 차장
최원석 국제부 차장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 정부 출범 전만 해도 일본인은 일왕에 열광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왕을 받들게 된 것은 메이지 정부가 권력 유지를 위해 택한 정책 때문이었다. 유신 주역들은 하급 무사들이었기 때문에 번주(藩主)나 자기들보다 신분이 높은 사무라이들을 누르고 정부의 권위를 세워줄 상징이 필요했다. 메이지 일왕은 1867년 즉위 당시 만 14세의 유약한 소년에 불과했지만 유신 주역들은 자신들조차 숭배하지 않던 어린 왕을 현인신(現人神)이라 치켜세우며 국가 지배를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천황은 신의 나라인 일본을 통치하는 현인신이다. 일본인은 신의 자손이다. 천황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개발됐다.

일본 대중은 메이지 말기를 거쳐 다이쇼(大正)·쇼와(昭和) 시대가 되자 '천황제'가 만든 민족적 나르시시즘에 도취했다. 당시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는 군부와 재벌이었다. 군부는 일왕의 손발이 되어 일하는 충신을 자처하며 왕의 권위에 기대어 국민 위에 군림했다. 재벌은 그런 군부와 손잡고 힘을 키웠다. 가리야 데쓰는 저서 '일본인과 천황'에서 "천황에 대해 불경한 얘기를 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금지됐으며, 근대 천황제는 이런 공포에 의해 유지됐다"고 비판했다. 군부와 재벌은 일왕의 권위를 내세워 국민을 지배했고 전쟁을 향해 폭주했다.

상징으로서의 일왕의 존재는 전후에 만들어진 일본 평화헌법 1조에도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러한 지위는 주권을 지닌 일본 국민의 총의에 의한다'는 문장으로 남아 있다. 아베 총리 등 일본 보수 세력은 헌법을 고쳐 이런 '상징 천황제'를 더 강화하려 하고 있다. 국가의 상징에서 국가의 원수로 승격시키려 한다. 일왕을 국가원수로 규정했던 옛날 메이지 헌법 체제에 가까운 형태로 되돌리려 하는 것이다. 옛날 군부가 그랬듯이 일왕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국민을 지배하겠다는 의도일 수 있다.

아베의 의도대로 되려면 일왕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존재하고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아키히토 일왕이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그만두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아베의 표정이 굳어졌고 일부 우익 세력은 일왕이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에 당황했다. 일본 사회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일왕이 헌법 개정에 단호한 반대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보기도 한다.

헌법 개정에 찬성하는 쪽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보도에서 지난달 9~11일 자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아베 내각 지지율이 직전 조사보다 4%포인트 높은 62%로 나타나 2년 만에 60%대로 올라섰다고 밝혔다. 아베가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총리직을 계속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도 59%가 '그렇다'고 했다. 이런 지지가 아베의 국정 운영 방향에 백지 위임장을 준 것은 아닐 것이다. 일왕부터가 위임장을 주지 않았다. 그의 생전 퇴위 의사는 평화헌법 개정 이후 있을지 모를 역사의 퇴행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