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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화 기행] (25) 안 팔리던 '군주론' 희곡으로 무대 올렸더니…지금도 연일 매진

바람아님 2013. 10. 14. 11:15
                    (25) 이탈리아 피렌체

서기관 복직 원한 마키아벨리, 정치적 현실주의 강력히 주장
'만드라골라'는 대중버전 연극


 

피렌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극은 무엇일까? 바로 마키아벨리의 '만드라골라'다.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가 극작가였다고?

그렇다. 정치적 권모술수를 뜻하는 마키아벨리즘의 원조가 된 이 사상가는 말년에 극작에도 손을 댔는데 그의 연극은 지금도

피렌체의 극장에서 셰익스피어 연극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일찍이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 "훌륭한 군주는 필요한 경우 거짓과 부도덕한 행위도 감수해야만 한다"는 독설

로 당대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군주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평화와 질서를 지켜내야 한다. 왜냐하면 안정되고

번영된 국가는 언제나 다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중세 1000년간 서양 기독교 사회는 정치적 이상주의를 지향했다. 군주는 선을 가까이 하고 신민에게 사랑과 관용의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중세의 군주에게 요구된 덕목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러한 정치적 이상주의의 비현실성을

지적하고 정치적 현실주의의 새 장을 연 것이다. 이것은 당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사분오열돼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가 강력

한 통일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관철시켜 나갈 수 있는 지도자가 절실하다는 점을 역설한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으로 《군주론》은 메디치가의 복귀로 공화국 서기관직에서

추방된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집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의 생각과 달리 엘리트들로부터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한다. 그의 친구로 후일 피렌체 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베틀리는 유보적인 반응만을 보였고 책을 헌정받은 메디치가의 젊은 공자인 로렌초는 아예 책장도 들춰보지

않았다고 한다. 낙담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로 결심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군주론에서 피력한 생각을 연극을 통해 전달하려 한 것이다. 연극 '만드라골라'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16세기 초 피렌체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살고 있던 카리마코라는 사나이가 피렌체의 나이 든 부자인 니치아에

게 루크레치아라는 아름답고 정숙한 젊은 아내가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에 그는 이 여인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피렌체로 온다. 그는 리글리오라는 간교한 재치를 갖춘 인물을 고용해 문제의 해결을 부탁한다. 리글리오는 무자식인 니치아가

아이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에게 접근해 아내가 만드라골라라는 마약을 먹은 남자와 동침하면 틀림없이 임신한다고

얘기한다. 다만 이 약을 먹은 남자는 곧 사망하게 되는데 뒤처리는 걱정 말라고 당부한다.

문제는 정숙한 루크레치아를 설득하는 것이었는데 리글리오는 고해신부 티모테오를 매수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신부는 주저하

는 루크레치아에게 이것이 남편을 위해 하는 일이라 죄가 되지 않으며 천당가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안심시킨다. 이렇게

해서 카리마코는 만드라골라를 먹은 남자로 위장해 아름다운 여인을 쟁취하게 된다.

얘기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동침 후 루크레치아는 카리마코에게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주길 간청하고 아이를 많이 갖고자

원하는 남편도 자신들의 관계를 묵인할 것이라고 말한다. 카리마코는 이 아름다운 여인을 영원히 소유하게 된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만드라골라라는 엉터리 마약을 통해 모두 다 만족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연극은 1518년 초연돼 대성공을 거둔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앞 다퉈 상연됐고 지식인 사이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수단이야

어떻든 모두가 만족하면 좋은 것 아니냐는 메시지를 담은 이 연극은 《군주론》의 대중 버전이었다. 물론 대중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읽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직 복귀라는 마키아벨리의 염원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1527년 마침내 58세의 마키아벨리에게 기회는 왔다.

메디치 정권이 붕괴되고 다시 공화정이 수립돼 공석이 된 제2서기국 서기관을 선출하게 됐는데 이때 입후보한 것이다. 하지만

선거에 출석한 의원 567명 중 그에게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불과 12명.나머지 555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공화주의자로서

메디치가에 유화적 태도를 취한 게 표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충격이 컸던 것일까. 그로부터

열흘 후 마키아벨리는 병으로 쓰러졌고 그 이틀 후 쓸쓸히 운명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죽음이었다.

 

마키아벨리의 평생을 보낸 곳이었던 만큼 피렌체에는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이

많다. 먼저 두오모 성당과 함께 피렌체의 상징적 건물인 베키오 은 1498년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관으로 선출돼 15년간 일했던 곳이다. 94m의 날렵한 종탑이 인상적

인 이 고딕 양식의 건물은 아직도 피렌체 시청사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고 일반에게 내부

관람도 허용되고 있다. 특히 시민의원들이 국사를 논의했던 2층의 500인 대회의실은

거대한 벽화와 화려한 장식으로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집은 아르노강 너머 피티궁전 근처에 있었다. 베키오 궁전에서 걸어서

불과 5분 거리로 가는 길목의 베키오 다리 위에는 세공점들이 들어서 있어 지나치는 여심을

설레게 한다. 마키아벨리가 실각 후 아직은 공직 복귀의 희망을 갖고 있던 시절 피렌체의

귀공자들과 어울렸던 오르첼라리의 정원은 피렌체 성곽의 서쪽 끝인 프라토 문 부근에 있었

는데 지금은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 마키아벨리의 유해가 안치된 산타 크로체 성당은

시뇨리아 광장에서 동쪽으로 5분 거리에 있다. 지금은 피렌체의 위인들의 묘지로 통하지만

그가 죽을 때만 해도 신자라면 누구나 묻힐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얼마 전 숙종조에 천인 출신으로 후궁이 된 숙빈 최씨의 일생을 다룬 사극이 주목을 끌었다. 이 사극이 인기를 끈 비결의 하나는

숙빈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이상주의자들이 노론과 소론으로 대변되는 현실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다고 설정한 대목이

다. 현실주의는 이상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이상주의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비현실적 부분을 보완하는 데서 그 참된 빛을

발한다는 점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상을 꿈꿀 수 있도록 희망의 씨앗을 파종함으로써 지탱된다. 그 점

에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정치적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직시하긴 했어도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힘없는 자들의 희생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보편적 공감을 얻기는 힘들어 보인다. 대중이 '만드라골라'에 공감

한 것은 가진 자들에 대한 풍자정신에 있었던 것이지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주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화국 의회가 마키아벨리를 낙선시킨 것은 그러한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던 것이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마키아벨리의 인간적 모습…왜 한국·일본서만 인기일까?

 

1996년 봄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여성작가 시오노 나나미(로마 거주)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라는 책이 국내 신문 서평란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국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극단적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설파한 르네상스시대의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키려 한 이 책은 당시 국내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나에게도 그간의 막연한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계기가 돼

유익한 독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키아벨리가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속에 드러난 여자관계,금전문제에 대한 태도는  지극히 속물적이어서 친근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또 행간에 드러난 그의 탁월한 유머감각을 통해 그가 '만드라골라' 같은 역작을 쓴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인간적 풍모가 그에 대한 이해를 도운 것은 분명하지만 작가가 의도한 대로 독자를

'현실주의' 사상가의 친구로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열광은 주로 일본적,한국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술에 대한 서구 역사가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역사의 다양한 측면을 외면하고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바라보고 있으며 부분적 사료에 의존,주관적 해석을 내린

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녀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듯한 우경적 시선도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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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범<미술사학 박사>의 "해외문화기행"은 본회로 종료하고 다음으로 " 풍경화 명작기행"을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