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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슬프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 어느 판사의 고백

바람아님 2019. 8. 12. 08:51
[중앙일보] 2019.08.11 11:00

『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울산지법 부장판사 인터뷰 

박주영 울산지법 부장판사의 모습.

[사진 김영사]


"법원은 슬프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세상을 보니 온 세상이 울고 있었다"
 
현직 부장판사가 『어떤 양형 이유』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저자인 박주영 울산지법 부장판사(51·연수원 28기)는 7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다 2005년 판사가 됐다. 이른바 경력 법관이다. 그는 스스로를 향판(鄕判) 또는 '출포판(출세를 포기한 판사)'이라 부른다.
 
한때 작가를 꿈꿨고 뒤늦게 들어간 사법연수원에선 출결 미달로 잘릴 뻔도 했다. 명문대에 들어가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서 좋은 성적으로 판사가 되던 전형적 법관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판결문엔 미묘한 힘이 있다. 판사와 법원을 달리보게 한다. 판사는 세상과 단절돼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있을 것이란 고정관념도 깨뜨린다. 
 
박 부장판사는 법원을 "수많은 이유와 죽음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라 정의하며 "슬프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고 돌아봤다. 그가 책에 담은 한 일화다.   
 


『어떤 양형 이유』 中 발췌

"한 할머니는 '무용지물 식충이로 구둘막 신세로 살기 싫어 다감한 내 엄마 곁으로 간다'는 유서를 남겼다. 남은 자식과 손자에게 일일히 사랑을 전한 할머니는 간소하게 장례를 치를 것, 없는 아들에게 재산을 좀더 주는 것을 이해해줄 것, 대학에 입학하는 손녀에게 입학축하금을 전해줄 것을 당부했다. 유서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기록 위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편지지 두 장짜리 유서를 읽다 법원에서 흘릴 눈물을 다 쏟아버렸다" 


   
그는 법원에서 밝은 표정의 피해자를 보고도 운 적이 있다고 했다. 친아빠에게 수년간 강간을 당한 자매였다. 
 
박 부장판사는 "작은 딸은 법원에 온 게 신기한지 증인석에 나와 이리저리 둘러보고 생글거리며 묻는 말에 답했다. 괴롭다고, 힘들어 죽겠다고 하는 것보다 몇백 배 지켜보기 괴로웠다"고 회고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법원은 세상의 모든 아픔이 몰려드는 곳처럼 느껴진다. 
 

박주영 부장판사의 저서 '어떤 양형 이유' [사진 김영사]

       
책의 제목이기도 한 '양형 이유'는 판사들이 판결문 말미에 적는 형(刑)의 이유를 뜻한다.
 
박 부장판사는 이 양형 이유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다. 의붓딸을 성폭행한 남성에게 중형을 선고하며 "성범죄는 영혼의 살해에 준한다"고 선언했다. 산재 판결에선 "피고인들을 무겁게 처벌하는 이유는 생명은 계량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환기하고자 함에 있다"고 밝혔다.
 
그는 책에서 "피고인에게 특별히 전할 말이 있거나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싶을 때면 양형 이유를 공들여 썼다"고 적었다. 이는 그의 책『어떤 양형 이유』가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이 진행 중인 서울중앙지법의 모습. [중앙포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이 진행 중인 서울중앙지법의 모습. [중앙포토]

       
중앙일보는 박 부장판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책에는 양형 이유와 법관으로서의 경험담은 물론 최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있는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에 대한 소회도 담겼다.

현안을 중심으로 질문지를 보냈고 A4용지 9쪽 분량의 답변을 받았다. 핵심을 간추려 인터뷰를 정리했다.
 
왜 스스로를 향판이라 부르나. 출세하고 싶은 건 판사도 똑같지 않나
"재야에 있다 법원에 와서 놀란 점은 *고등부장 승진제도였다. 판사들의 유일한 지상목표였다. 그 경쟁의 치열함과 열기도 엄청났고, 승진하지 못하면 낙오자라 자책하며 우르르 옷을 벗는 것도 참 이상했다. 나 같은 경력 법관은 아예 승진을 할 수가 없어 그런 표현을 썼다. 또한 왕이 다 같은 왕이 아니듯 판사도 다 같은 판사가 아니고, 이 사실이 판사 사회를 분열시키고 자존심 하나만 남은 판사들을 관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었다"
 
※차관급 예우를 받는 법원장 전 판사들의 대표적 승진 코스. 판사의 관료화 우려로 올해 1월부터 폐지됐다.    
 
판사가 실명 비판을 받는 시대가 됐다. 판사들은 사회적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나
"판사들이 사회적 비판에 신경을 안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도 무수히 상처받고 주위 판사들도 숱하게 속상해한다. 시크한 척, 대범한 척 할뿐이다. 댓글을 보며 부끄럽고, 민망하고, 속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비난은 판사의 숙명이다. 판사들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고 국민들은 비판할 자유가 있다. 다만 진행되는 사건에 대한 과도한 비판은 조금 신중해주셨으면 한다. 저울이 놓인 탁자를 흔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언급(사법농단이라 기재)도 나온다. 이 사건으로 많은 판사들이 아파했다고 했다.
"나 같은 필부조차도 경외감과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법원이 인권의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며 입이 백개쯤 되어도 할 말이 없어졌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판사를 감시하고 길들이려 했던 부분은 봐줄만 했다. 그렇게 굴복한 판사는 자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제노동 징용자들, KTX여승무원과 같은 소수자들을 기망하려 시도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22일 보석으로 풀려나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오종택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22일 보석으로 풀려나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오종택 기자


이번 사태 이후 판사들은 무엇이 변했나
"판사들은 원래 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사건을 전후해서 (판사와 법원이) 엄청나게 변했다. 사법부의 독립, 판사 개개인과 구체적 재판의 독립, 자기검열에 따른 위축, 소극적 판단과 보신주의 적당주의, 두루두루 원만해야 한다는 처세에 대한 강박과 같은 것들에 대한 문제를 직시하게 된 것이 이번 사태의 가장 큰 교훈이다. 하지만 판사들이 편을 나눠 서로를 미워하는 것은 정말 보기 불편하다. 이번 사태로 다소나마 판사들이 서로를 증오하게 됐다는 점은 뼈아픈 지점이다" 
 
책에는 성범죄와 산재 등에 대한 박주영 판사 개인의 의견이 드러나는데
"이 책을 쓰며 가장 고민했던 지점이다. 재판하는 사람들이 극도로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심증 개시이다. 그런 일은 없어야 겠지만 성범죄 피고인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 생각하고, 산재나 노동 관련 사건의 사용자 측은 나를 친노동자 성향의 판사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판사도 공동체의 일원이고 도를 넘지 않는다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법대 뒤에 꽁꽁 숨은 법원의 비밀스러운 모습이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시각을 악화시키지 않았을까. 다만, 구체적 재판에서 내 가치관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은 아니다"
 
판결문의 양형이유는 대부분 형식적이다. 문학적 비유 등을 남긴 이유가 있나
"성공한 재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판이라 생각한다. 아동성범죄에는 "어린 아이를 성폭행하는 것은 '천인공노할 범행'이란 표현보다 '영혼의 살해'라는 표현이, 산재 사건에는 '안전 불감의 세태가 개탄스럽다'는 표현보다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가족들이 있다'는 표현이 더 이해하기 쉽고 가슴에 와 닿는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재판을 하고 싶어 그런 표현을 썼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춘천지방법원장 시절 엄지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있던 모습. 판사들은 법원에서 지급받은 골무로 매달 수백건의 사건 기록을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과로로 쓰러지는 판사들도 계속해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이 춘천지방법원장 시절 엄지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있던 모습. 판사들은 법원에서 지급받은 골무로 매달 수백건의 사건 기록을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과로로 쓰러지는 판사들도 계속해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책에는 과로로 목숨을 잃은 동료 법관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동료들과 법원 직원들의 비보가 들려오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판사들과 법원 구성원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궁극적으로는 재판의 충실화를 위해서라도 엑셀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살짝 한두번만 밟았으면 좋겠다. 형사재판을 하다보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고 고민할 만큼 합리적 시간이 부여되는지 의문이 든다. 다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과연 승객(국민)들이 그런 상황을 용인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책을 읽은 독자가 어떤 생각을 하길 바라는지
"큰 바람은 없고 '판사들 이거 우리하고 영 딴 나라에 살면서 형편없는 인간들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조금 봐줄만하네' 정도로만 읽혔으면 좋겠다. 다소 실망스러운 말이겠지만 판사도 똑같이 지질한 인간들이다. 크게 뛰어나지도 크게 나쁜 인간들도 아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큰 힘을 갖고 있어서 그 힘을 주체할 수 없어 쩔쩔매는 사람들이다. 가끔 당사자들의 '수고하셨다'는 다정한 말 한 마디에 힘이 나서 밤 새워 판결을 쓰고, 정말 어쩌다가 받는 감사의 편지 한 통에 남은 판사 생활이 달라지는 게 대한민국의 판사들 같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