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곽아람 기자의 캔버스] "韓·日, 역사 콤플렉스 벗어던져라"

바람아님 2015. 2. 7. 11:14

(출처-조선일보 Why? 2015.02.07 곽아람 기자)

'日문화유산답사기' 일본서 펴낸 유홍준 前문화재청장

베스트셀러 된 비결 싱싱한 구어체로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써 문단선 '수다체'라 말해

비난 각오하고 쓴 책 아베 정부 들어서면서
일본서 혐한론 등장하자 서로 알아가자는 생각에
집필하기 시작

지난 3일 오후 서울 남가좌동에 있는 명지대 유홍준(66) 석좌 교수 연구실. 책장에 말라비틀어진 북어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저 북어 봤어요? 나무로 만든 북어잖아. 제사상에 맨날 진짜 북어 올리는 게 아니라, 

저거 하나 갖고 '만년구짜'로 올려 먹는 거야. 인사동 고미술 가게에서 산 백 년쯤 된 물건이야.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배도 가르고 눈깔도 다 진짜인 것처럼 했잖아."

유홍준은 "북어를 걸어놓으면 복이 온다지 않나"며 웃었다.

유홍준은 명지대의 방 두 개를 서재와 연구실로 쓰고 있었다. 

2만권쯤 된다는 장서와 함께 도자기며 그림이 곳곳에 놓인 풍경은 풍류를 즐기던 조선시대 선비의 사랑방이 재현된 것처럼 

보였다.

180㎝의 큰 키, 광대뼈가 도드라져 엄격해 보이는 얼굴이 '달변가'라는 명성답게 일단 말을 시작하자 부드러워졌다. 

유홍준은 강연이라도 하듯 쉴 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익히 알려진 대로 유홍준은 90년대 대한민국에 문화 유적 답사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이다. 

그는 영남대 교수로 있던 1993년 5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인 '남도답사일번지'를 출간하며 일약 스타 작가가 됐다. 

'아는 만큼 보인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같은 말을 유행시키며 잊고 있던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답사기 1권은 지금까지 모두 130만부 팔렸으며, 최근 교보문고가 집계한 90년대 종합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2012년 인문서로서는 처음으로 1~6권이 300만부를 돌파하며 기록을 세웠고, 지금까지 1~7권 합쳐 모두 350만부가 팔렸다.

서로를 인정 안 하는 韓·日
일본, 고대史 콤플렉스로 역사 왜곡 일삼아
한국은 근대史 콤플렉스 日 문화를 무시해

兩國 간 민감한 이슈라…
한반도로부터 문명의 빛 갔다는 걸 분명히 하고
일본美 특질 공들여 연구

첫 답사기 발간 이후 20년, 그는 해외로 발을 뻗어나갔다. 2013년 7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을 펴냈다. 

책은 지난해 11월 모두 네 권으로 마무리됐다. 책을 출간한 창비 관계자는 "네 권 합쳐 20만부가량 팔렸다"고 밝혔다.

책의 인기는 국내로만 그치지 않았다. 

지난달 27일 일본의 유서 깊은 출판사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에서 1권 규슈편이 번역 출간됐고, 

이달 말엔 2권 아스카·나라 편이 출간된다. 1권 띠지에 이런 문구가 적혔다.

"한국에서 한 집당 한 권씩 있는 대형 베스트셀러 시리즈의 일본편!"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은 지난 6일 '한국 학자, 일본을 걷다'라는 기사로 이 책의 일본어판 간행 소식을 알렸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지난 3일 학교 연구실에서 지금까지 출간한 저서를 무릎 위에 얹고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그는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며 “대중이 역사를 책으로만 이해하기보다 유물을 통한 문화사를 통해 이해하길 바라며 답사기를 썼다”고 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지난 3일 학교 연구실에서 지금까지 출간한 

저서를 무릎 위에 얹고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그는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며 

“대중이 역사를 책으로만 이해하기보다 

유물을 통한 문화사를 통해 이해하길 바라며 

답사기를 썼다”고 했다.

 / 김지호 기자


"문화 유산 통해 서로를 더 많이 알았으면"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 문제로 한·일 관계가 경색돼 있는 이 시점에, 
한국 학자가 쓴 일본 문화 유적 답사기를 일본의 유명 출판사가 번역 출간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유홍준은 일본 답사기 1권 서문에 
"일본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면서 
"한·일 양국은 모두 이 콤플렉스의 색안경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썼다.

이번 답사기는 한국이나 일본 어느 한 쪽의 문화가 우월하다고 외치는 책이 아니다. 
책은 일본 고대문화에 도래인(渡來人·5~6세기경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끼친 영향을 탐구하면서도, 
거기에서 자라난 것은 일본 문화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3권에선 한반도와 일본 문화와의 관계를 짚었고, 4권 '교토의 명소'에선 일본미(美)를 집중 탐구했다. 
유홍준은 "민감한 문제라 '주판'을 많이 놨다. 
문명의 빛은 한반도로부터 갔다는 걸 분명히 하고, 4권에서는 일본미의 특질을 공들여 파헤쳤다"고 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만든 문화가 '일본 문화'라는 시각은 국수주의자들로부터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

"김연아한테 배웠다. 지난해 소치 동계올림픽 은메달은 김연아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다. 
스케이트를 집어던지며 울어도 동정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웃으면서
'나보다 금메달이 더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한국인의 도덕 수준을 얼마나 높여줬나. 
아베 일본 총리가 하고 있는 일은 진실성이 결여됐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일종의 '더티 플레이'다. 
그런데 저쪽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도 진흙탕에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망신이다. 
일본 문화는 문화대로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오래전부터 일본 답사기를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베 정부 들어서면서 혐한론이 나오는 등 한·일 관계가 삐걱거리는 걸 보고 
문화유산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자는 생각에서 집필을 시작했다."

지난달 27일 일본에서 출간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지난달 27일 일본에서 출간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 창비 제공
―일본 고대 문화와 한반도의 영향관계에 대해 시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있나.

"나 자신만 해도 '교토의 불국사'인 청수사(淸水寺) 창건자가 백제계라는 것만 알고 애국적 관점에서 접근했었다. 
2000년 무렵 교토에서 그의 초상조각을 보았더니 전형적인 일본인 무사상이었다. 충격이었다. 
'일본에 가서 정착한 지 200년도 더 되는 도래인 후손을 나는 어떻게 한국 사람일 거라고 기대했을까' 싶었다. 
이후 도래인 후손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케네디 가문이 아일랜드계(系)이지만 결국은 미국인인 것처럼 도래인이 일본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명백히 선을 그어야 한다.
그러나 그간은 도래인 10세가 만든 것도 한반도의 영향인 것처럼 이야기해 왔다."

유홍준의 일본답사기는 외래어 고유명사는 원지음(原地音)을 따라 표기한다는 국립국어원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 
문화유적이나 사람 이름을 우리식 한자음으로 표기했다. 
교토의 명찰(名刹) '료안지(龍安寺)'를 '용안사'로 표기한 것이 대표적이다. 유홍준은 설명했다.

"한자를 전혀 모르는 세대에겐 '용안사'나 '료안지'나 똑같지만, 한자를 아는 사람에겐 '료안지'보다 '용안사'가 입에 붙고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도다이지(東大寺) 옆에 있는 고호쿠지(興福寺)에 들러 야쿠시지(藥師寺)에서 마무리한다'라고 하면 어렵지만, 
'동대사 옆에 있는 흥복사에 들러 약사사에서 마무리한다'고 하면 안 가봐도 아는 것 같지 않나. 
일본 역사 문화책이 안 팔리는 건 지명과 인명이 낯설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 소설이 이름 외기 어려워 읽기 힘든 것과 비슷한 거다."

무료로 연재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007년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서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의 은행 예금이 화제가 됐다. 
그는 총 재산 신고액 30억5100여만원 중 은행 예금으로 16억8800만원을 신고했다. 재산의 55%가 예금인 셈이었다. 
당시 유홍준은 "청장 연봉에 해당하는 8000만원 정도의 인세가 한 해 평균 들어왔는데 지난해에는 
'만화 문화유산답사기'의 선인세를 받아 1억원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마흔 다섯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평론집 제외하고 대중서로서는 '첫 책'인 셈인데 기분이 어땠나.

"기분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없었다. 강연 요청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왔다. 
일주일에 사흘 수업하고 나머지 날들은 강연하려 다녔다. 군(郡) 단위로 안 간 곳이 없었다."

―왜 그렇게 잘 팔렸을까.

"친절하고 쉽게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가르쳐주는 책이 없었던 거다. 
여행이라는 형식을 얽어 따라가 보고 싶게 한 것도 주효했던 것 같다. 
'마이카 시대'였다.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은데 유흥지, 피서지가 아닌 교육적인 '갈 곳'을 알려준 거다."

―어떻게 해서 그 책을 쓰게 됐나.

"1991년 친구들과 함께 월간 '사회평론'을 창간했다. 
한 친구가 '학생들 데리고 답사 다니며 한 이야기를 글로 쓰면 어떻겠냐'고 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 무료로 연재하기로 했다. 창간호 발행 이후 인사동 전시회 개막식에서 창비 편집위원으로 있던 
백낙청 서울대 교수를 만났는데 '연재가 끝나면 책을 내자'고 하더라."

―문화유산을 다룬 책은 보통 '물건'이 주인공인데, 유홍준의 책은 필자가 주인공 같다.

"사람들이 편히 읽을 수 있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출판사 사람들이 내 책의 강점을 '구어체가 갖고 있는 싱싱함'이라고 분석했다. 
한때 문단에서 내 문체를 놓고 '만연체'냐 '화려체'냐를 논하다가 결국 '수다체'라고 결론 내렸다고 하더라."

―학계에선 학자가 공부는 안 하고 대중적 인기만 누리려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런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농사짓듯 지식을 확보하고 축적해 논마지기, 밭 마지기를 넓혀놓은 거다. 
그러나 그들은 밥을 지을 줄을 몰랐다. 어쨌든 나는 밥을 지어 내놓은 거다. 
그런데 농사를 안 짓고 밥만 지어서는 한계가 있다. 
나도 논·밭 마지기 넓혀가는 농사는 농사대로 지으면서 볶음밥도 하고, 카레라이스도 하는 거다. 
물론 나는 기존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정통 학자는 아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여건도 안 됐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들 방식이 있는 거고, 나는 내가 공부한 걸 대중적인 형식으로 쓴 거다."

유홍준은 일본 답사기에 '중용(中庸)'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며, 어떤 사람은 노력해서 안다. 
(…) 그러나 이루어지면 매한가지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나는 노력해서 아는 거지.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보면 모르나? 
가끔 나더러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며 칭찬이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 들을 때마다 억울하다. 
나는 노력했는데 남들은 거저먹은 줄 안다. 타고난 게 없으면 노력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이루어지면 매한가지'라고 하는 게 우리에게 얼마나 희망을 주나."

유홍준은 “일본 답사기를 쓰기 위해 지난 2년간 3박4일씩 일본을 열두 번 다녀왔다”며 “앞으로 시간이 허락한다면 연암 박지원 등 조선시대 때 청나라에 파견된 연행사(燕行使)들의 발자취를 밟아가는 중국 기행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유홍준은 “일본 답사기를 쓰기 위해 지난 2년간 3박4일씩 일본을 열두 번 
다녀왔다”며 “앞으로 시간이 허락한다면 연암 박지원 등 조선시대 때 
청나라에 파견된 연행사(燕行使)들의 발자취를 밟아가는 
중국 기행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 김지호 기자

숭례문 화재는 시스템 문제
국보 1호가 불탔는데 문화재청장이 가만있으면
안되는게 대한민국 정서 빨리 떠나는게 상책이었다

"숭례문 방화 사건은 시스템의 문제"


유홍준은 1949년 서울에서 2남 4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일제 시대 공고 졸업 후 비행기 정비공장에 다녔던 부친은 6·25 휴전 협정 이후 총무처에 취직했고, 
다음엔 조선호텔·반도호텔 등의 기계설비과장을 지냈다. 
유홍준은 1967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고, 이후 미술사로 방향을 틀어 1983년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왜 미술사로 전공을 바꿨나.

"김윤수 전(前)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미술사의 철학' 강의를 들은 게 계기가 됐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가지고 그렇게 말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위대해 보였다. 
마침 아널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번역 출간돼 소개됐는데, 
달나라에서 만 년 전부터 지구를 내려다본 사람이 쓴 것처럼 시야가 넓더라. 
'나도 우리 미술을 이렇게 해석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서양미술사에 심취했다가 이후 한국미술사로 '개종'했다."

―삼선개헌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1974년에 수감돼 11개월간 옥에 있었다. 어떤 경험이었나.

"별건 없었다. 80년대 학생운동하고는 달리 조직도 없었고, 당시엔 양심적인 지식인의 자기 선언 같은 거였다. 
다만 '시대의 지식인으로 살면서 그런 고통쯤은 감내해야지' 하는 배짱은 있었다. 
감옥에서 이동주의 '한국회화소사', 톨스토이의 '예술론' 같은 걸 읽었다."

"교수 임용되기 前 7년 백수생활… '답사기' 쓰는 자양분 됐다"
베스트셀러 된 비결, 싱싱한 구어체로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써 문단선 '수다체'라 말해

―출소 후 건축잡지 '공간'과 '계간미술' 기자로 일했다.

"그때 치사하게 복학을 안 시켜주더라. 
형집행정지라 취직할 방법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이경성 선생(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건축가 김수근 선생에게 소개해서 
공간으로 갔다. 이후 계간미술 창간하는데 유경험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스카우트됐다. 
계간미술에 있으면서 '한국의 미' 시리즈를 만들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사진 찍고, 
자료 수집하면서 '답사기'를 위한 임상실험을 그때 다 한 것 같다."

유홍준은 1980년에 복학했고,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1984년 서울시내 모 대학 미대 교수로 임용됐지만, 구속수감 경력이 문제가 돼 임용이 취소됐다. 
그 후 1991년 영남대 교수로 임용되기 전 7년간을 '백수'로 살았다. 
그는 "'프리' 선언을 하고 야인처럼 살았다. 하고 싶은 걸 원 없이 했다. 대신 열심히 했다. 
교수는 가만히 있어도 그 지위 덕에 인정받지만, 백수는 오직 자기가 한 것만 거둘 수 있다"면서 
"나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은 오직 글과 논문밖에 없었다. '
답사기'의 모태가 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개설한 것도 그때였다"고 말했다.

'답사기'의 인기는 '야인(野人)' 유홍준을 '주류(主流) 세계'로 불러들였다. 
2002년엔 명지대 교수로 초빙됐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3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장직에 지원했다.

―당시 가장 유력한 국립중앙박물관장 후보로 꼽혔는데 결국 후보에서 사퇴했다.

"인터넷에 사전 내정설이 돌면서 시끄러워지자 정부에서 나더러 거기 가지 말고 문화재청장을 차관급으로 격상시킬 테니 
문화재청장을 하라고 언질을 줬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 차관급이 되려면 정부조직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거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1년간 법안을 하나도 통과를 안 시켜줬다. 
이듬해 2월에 정부조직법이 바뀌었는데 이번엔 탄핵이 된 거다. 결국 그해 9월에야 문화재청장이 됐다. 
그 1년 반 동안 아주 환장하겠더라. 
뭘 할 수도 없고, '내정됐으니 나 이거 못한다' 그럴 수도 없고. 다 잊어버리니까 그때 가서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으로 문화재청장이 된 건가.

"노 전 대통령을 그전에 만난 적은 없다. 그분이 독서 인사(人事)를 하는 분 아닌가. 
내 책을 다 읽고 감동을 받았던 차에 주변에서 날 추천한 거다."

―문화재청장 하면서 남다르게 했다고 생각하나.

"재미있게 했다. 원 없이 했다. 
문화재 행정이란 게 관리만 할 뿐 적극적으로 개입해 기획한다는 개념이 없었는데 난 다르게 했다. 
경회루를 개방하는 걸로 시작해서 못 들어가게 한 목조건축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물론 반대도 많았다."

―문화재청장 시절인 2008년 2월 숭례문이 불에 탔는데.

"난감했다. 그건 시스템이 잘못됐던 거다. 
서울 한복판에 최고의 소방차 60대가 출동했는데 연기 나는 걸 왜 못 껐겠나. 
똑같은 사건이 1년쯤 전에 있었다. 수원 화성 서장대에서 불이 났다. 
소방수가 20분 만에 출동해 2층을 부수고 불을 껐더니 정부에서 과잉 진화라고 경찰에 고소했다. 
소방수 입장에선 (숭례문이) 불에 타면 아무 일 없고, 부수고 끄면 경찰조사를 받는 거다. 
그래서 아무도 안 부순 거다. 나는 당시 파리에 있었고 문화재청에서는 부수고 책임진다는 사람이 없었다. 
시스템이었다. 문화재청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그래서 결국 책임지고 물러난 거 아닌가.

"예를 들어 보자. 강릉객사문이 불탔다고 하면, 강릉 시장 책임인가, 문화재청장 책임인가. 
숭례문 관리자는 서울시 중구청이다. 포커판에서 돈 잃었으면 빨리 가야지 무슨 개평을 기다리겠나. 
그렇게 써 달라. 시스템이 잘못됐든 뭐가 어쨌든 명색이 국보 1호가 불탔는데 문화재청장이 가만있으면 안 되는 게 
대한민국 정서 아닌가. 그게 누구 관할이냐 이런 거 따질 때가 아니지 않나. 빨리 떠나는 게 상책이었다."

세 시간가량 마주앉아 있는 동안 유홍준은 시종일관 당당했고 자신감에 넘쳤으며 한 번 한 말을 거두지 않았다. 
"당신 칼럼에 오류가 잦던데"라는 말에도 주눅이 들지 않고 "기억으로 쓰니까. 
그게 내가 베껴 먹는 게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베껴 먹는 놈은 틀리지 않는다"고 응수했다.

문화재청장 시절 그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과 각료들을 붙임성 좋은 갯과(科)와 친화력 부족한 고양잇과로 나누어 
평하면서 "나는 '순 토종 갯과'"라고 자평했었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괴상한 아이지. 진기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구속받지 않고, 틀린 건 틀린 거고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너무 명확해서 문제지. 
내 별명 중 하나가 '얄개'다. 얄개 끼가 있어서 '저 웬수 같은 놈'이란 말을 많이 듣는다. 
대신 명랑하니까, 악의가 없으니까 용서된다고나 할까. 명랑하고 밝은 게 내 장점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