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7.15
[김종필 증언론 '소이부답'] <57> 박정희?키신저 회담
1973년 11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방한한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과 청와대에서 오찬을 함께한 뒤 단독 회담을 위해 집무실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일본 방문에 이어 서울에 들른 키신저는 이날 5시간 동안 머물다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오른쪽 뒤편은 조상호 의전수석비서관. [사진 국가기록원]
미국과 월맹 간 휴전협상이 한창이던 1972년 10월이었다. 미국은 10년 넘게 끌어온 전쟁을 끝내려 했다. 월남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월남군의 전력을 강화시켜 독자적으로 방어케 하는 이른바 ‘월남화(Vietnamization·월남전은 월남인에게 맡긴다)’에 박차를 가했다. 어느 날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가 국무총리실로 나를 찾아왔다.
하비브 대사는 내게 “월남의 공군력 증강을 위해 미국이 한국에 대여한 F-5A 전투기 3개 대대를 빼서 월남에 줘야겠습니다”고 말했다. 일종의 통보에 가까웠다. 나는 그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했다. “미국은 월남만 중요하고 한국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3개 대대를 가지고 가면 하늘에 구멍이 뻥 뚫리는데 안 됩니다. 내줄 수 없소.” 전투기 3개 대대면 54대다. 그때 한국이 보유한 F-5A 전투기는 모두 76대였다. 내 말에 아랑곳없이 하비브 대사는 “미국이 정한 방침이니 고려해 달라”며 돌아갔다. 며칠 뒤 그가 “월남으로 전투기를 보낼 준비가 됐느냐”며 다시 찾아왔다. 나는 “아무 준비도 안 했소. 우린 월남에 한 대도 보낼 생각이 없소”라고 답했다. 자신의 말을 들은 척 만 척한 게 기분이 상했던지 하비브 대사가 “이건 한국 게 아니라 미국 소유 전투기입니다. 주인이 달라는데 못 주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라고 따졌다.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투기 소유주가 미국임은 나도 분명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일단 한국 땅에 온 이상, 주인이 한국으로 바뀌었소. 우리가 못 주겠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내가 막무가내로 버티자 하비브 대사는 청와대로 올라갔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리가 되지도 않는 말만 합니다”라며 하소연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총리하고 협상을 시작했으면 거기서 끝내야지, 왜 여기 오느냐”며 그를 돌려보냈다.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 무슨 일인지를 묻기에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내가 “미군 전투기도 한국에 온 이상 한국이 주인이다”고 대꾸했다고 했더니 “그래서 나한테 왔구먼”이라며 껄껄 웃었다.
10월 하순에 접어들자 미국이 급해졌다. 하비브 대사가 “어떻게 해주면 전투기를 내주겠습니까”라며 다시 찾아왔다. 나는 “지금 말하는 것은 마지막 제안”이라는 전제를 달고 이렇게 말했다. “팬텀(F-4D) 1개 대대를 주면 F-5A 2개 대대를 내주겠소.”
팬텀은 당대 최신·최강의 전투기였다. 팬텀 1개 대대와 F-5A 2개 대대의 전력이 맞먹었다. 내 말에 하비브는 팬텀은 비싸고, 생산된 물량도 없다며 펄쩍 뛰었다. 나는 “그렇다면 얘기는 끝났다”고 했다. 사나흘 뒤 다시 온 하비브 대사는 “호주가 사 가기로 계약한 팬텀 1개 대대를 내주겠습니다. 대신 F-5A 3개 대대를 주십시오”라고 수정 제안을 했다. 나는 “안 됩니다. 2개 대대도 많은 겁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줄다리기 끝에 결국 미국 측이 두 손을 들었다. 하비브 대사는 팬텀 1개 대대와 F-5A 2개 대대를 맞바꾸자는 내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했다. 나는 또 하나 조건을 달았다. “한국에 오는 팬텀 1번기 앞바퀴가 대구 비행장에 착륙하는 바로 그 시각에 수원 비행장에서 F-5A 1번기가 월남을 향해 뜨게 하겠소”라고 했다. 팬텀이 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F-5A를 내주겠다는 뜻이었다. 하비브 대사는 “아, 왜 이렇게 까다롭습니까”라며 투덜거렸다. 나는 “까다로운 게 아니라, 국방 문제니까 소홀히 할 수 없는 법”이라고 대답했다.
72년 10월 말 우리 공군의 F-5A 36대가 수원비행장에서 월남을 향해 떠났다. 같은 날 대구비행장에 착륙한 팬텀은 1번기를 시작으로 총 18대가 들어왔다. 이로써 당시 한국 공군은 한동안 북한·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 중 최강의 공군력을 지니게 됐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는 팬텀을 추가로 구입해 팬텀은 공군의 주력기가 된다.
미국과 월맹 간 휴전협상은 급진전돼 73년 1월 28일 마침내 정전(停戰)이 발효됐다. 협상을 주도한 인물은 헨리 키신저 미 백악관 보좌관이었는데 그해 9월 국무장관에 올랐다. 73년 11월 16일 나는 방한한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을 김포공항에서 영접했다. 청와대에서 열린 박 대통령과 오찬 자리에 함께 참석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키신저는 71년 베이징 비밀협상을 통해 72년 닉슨-마오쩌둥 정상회담(2월 21일)을 성사시켜 세계사의 질서를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티우 대통령 (1923~2001·左), 하비브 대사 (1920~1992·右)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박 대통령이 “이보시오, 미스터 키신저. 잘된 거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질문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키신저가 대통령 얼굴만 멀뚱히 쳐다봤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냉정한 어투로 딱 잘라 말했다. “이제 월남은 끝났구먼. 끝의 시작이오.”
키신저가 놀란 눈으로 “끝나다니,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정전 협정을 했다고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가만히 있을 족속들이 아닙니다. 미군이 다 철수했으니 월맹이 본격적으로 침공을 시작할 겁니다. 월남군은 막지 못합니다. 남쪽은 이제 평화가 왔다고 민주주의 운운하면서 미국 원조나 기다리고 있겠지만, 월맹에선 이제 월남 통일이 눈앞에 보인다고 할 거요.”
1965년 4월 30일 수원공군기지에서 열린 F-5A/B 전투기 인수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전투기를 살펴보고 있다. 왼쪽은 신동관 청와대 경호과장.
박 대통령의 판단이 정확했음을 확인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75년 4월 30일 오전 10시14분 월남의 두옹 반 민 대통령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월맹군 탱크가 사이공 대통령 관저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 월맹의 깃발을 올렸다.
월남의 구엔 반 티우 전 대통령은 그 며칠 전인 4월 21일 사임을 발표한 뒤 대만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했다. 박 대통령이 키신저에게 “월남은 끝났다”고 말한 지 1년 반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티우 대통령의 망명과 관련해 내가 장징궈(蔣經國·장경국) 대만 총통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다. 티우는 장 총통이 보내준 보잉727기를 타고 타이베이(臺北)로 탈출했는데, 그 비행기 안에는 상당량의 금괴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티우는 장 총통에게 “이 금괴를 달러로 바꿔줄 수 없는가”라고 요청했고 장 총통은 그렇게 해줬다. 그 뒤 티우는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89년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했다. 런던에서 지낼 때 그는 007 영화의 주인공 숀 코너리의 옆 저택에서 살았다.
우리 국군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게 무너진 월남 정부의 종말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었다. 월남은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군비와 화력 면에서 월등히 앞섰다. 하지만 미국에 의존하던 월남 국민들은 자기들끼리 삿대질하고 분열했다. 최후의 1인까지 싸워 이기겠다는 결의를 상실했고 그것이 패망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려면 스스로 지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가슴에 새겼다.
월남이 총공세에 밀려나던 74년, 하비브 대사 후임인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가 나를 찾아왔다. 우리가 월남에 보냈던 F-5A 전투기 2개 대대를 다시 돌려주겠으니 받으라고 했다. 대신 F-5A를 정비하는 데 든 410만 달러를 내라고 요구했다. F-5A는 대만에서 정비를 마쳤으나 결국 월남의 탄손누트 공항으로 보내지 않았다. 월남의 불리한 전황 때문이었다. 나는 스나이더 대사에게 “예산도 없고 외환도 없다. 못 낸다”고 버텼다. F-5A는 원위치에 돌아왔다. 수리비는 끝까지 내지 않았다. 우리로서는 팬텀 1개 대대를 고스란히 공짜로 얻은 셈이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F-5A/B와 F-4팬텀=미국 노스롭사가 제작한 저가의 경량 전투기 F-5A/B(A형은 1인승, B는 2인승)는 1965년 군사원조계획의 일환으로 국내에 처음 도입됐다. 한국 공군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로 2005년 퇴역했다. 별칭은 ‘자유의 투사(Freedom Fighter)’. F-4팬텀은 맥도널더글러스사가 제작한 쌍발 대형 전투기(2인승)다. 69년 6기가 국내에 처음 도입돼 F-15K 이전까지 한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다. 기종 노후로 순차적으로 퇴역시키고 있지만 일부는 아직 운영 중이다. ‘하늘의 도깨비’로 불린다.
◆구엔 반 티우(Nguyen Van Thieu )=월남(남베트남)을 패망으로 이끈 대통령. 20대엔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에서 활동했지만, 이후 전향해 프랑스가 만든 월남군에 입대해 베트민과 싸웠다. 월남군 제1사단장(대령) 시절인 63년 두옹 반 민의 쿠데타에 협력해 고딘 디엠 정권을 전복했다. 65년 군사정권의 국가지도위 의장(국가원수)에 올랐고, 67년 민정 이양 뒤 대통령에 당선됐다. 71년 부정선거 시비 속에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다. 75년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에 사임하고 대만으로 도망갔다. 2001년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 인물 소사전 헨리 키신저(92)=독일 태생 유대인으로 청소년 시절 나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하버드대에서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평화체제·세력균형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아 이 대학의 국제정치학 교수를 지냈다. 1969년 닉슨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으로 취임했다. 73년 1월 월맹의 정치국원 레득토와 휴전 협상을 체결한 공로로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73년 국무장관에 올라 포드 행정부에서 유임됐으나 77년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현재 컨설팅사 ‘키신저 어소시에이트’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