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때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저력의 뿌리는 19세기 메이지 유신이다. 일본의 근대국가 건설 시기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 ‘조용한 혁명’(소명출판·사진)이 최근 나왔다. 일본 역사의 한 시대를 종합한 국내 연구서는 드물다. 동서대 초빙교수를 지낸 저자 성희엽 씨(국제학 박사)는 “서양의 침탈에 맞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면서 자립적으로 발전한 일본 근대사를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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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혁명’의 저자 성희엽 박사는 “메이지 유신 다음 세대의 일본 지도자들은 군국주의 파시즘이라는 최악의 선택으로 일본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성희엽 박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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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은 통상 ‘혁명’으로 불리지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그 이유는 ‘천황가(家)’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일본의 전통, 메이지 유신이 전(前)근대적 절대주의 국가를 만들었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영향, 위로부터의 변화에 불과했다는 서구학자들의 편견 탓이다. 성 박사는 “침략적 팽창정책을 추진하면서 의미가 퇴색되기는 했지만 일본의 유신과 건국은 왕정복고 쿠데타일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봉건적 껍데기를 벗고 근대적 전환에 성공한 사회경제적 혁명”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일본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큰 요인으로 덴포(天保·일본 연호·1830∼1844년) 시기에 태어나고 자란 ‘덴포기의 아이들’, 즉 청년 사무라이 혁명가들의 형성을 들었다. 이들은 지역과 신분으로 분열된 봉건 막번(幕藩) 체제(절대 지배자인 쇼군이 막부를 장악하고, 그 아래 여러 다이묘의 번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정치 제도)에서는 군사력이 월등한 서구 열강의 위협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강렬한 민족적 정체성과 근대적 국가의식을 갖게 된 이들이 혁명의 주력이 됐다는 것이다.
1부 ‘유신과 건국의 기원’에서는 국학 유학 난학(蘭學·네덜란드에서 전해진 지식을 연구한 학문) 등 메이지 유신의 바탕이 되는 사상적 변화를 조명했고, 2부 ‘유신 혁명’과 3부 ‘건국’에서는 혁명 과정과 경제 군사 법률 제도의 성립을 다뤘다.
800쪽에 가까운 이 책이 나오기까지 7년이 걸렸다. 부산시장 대외협력보좌관, 기획재정부 홍보전문관 등으로 6년간 일하던 저자는 연구와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2011년 말 직장을 그만뒀다. 언어적인 어려움이 가장 컸다. 국학을 공부하려면 한문과 고대 일본어도 알아야 했다. 책에는 저자가 메이지 유신과 관련된 도시 25개를 탐방하면서 찍은 사진이 실려 이해를 돕는다.
성 박사는 “식민 지배를 겪은 우리는 한일관계의 적대적 측면에만 주목해 일본 현대사를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며 “한국의 국력이 일본을 많이 따라잡은 오늘날에는 일본의 역사 발전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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