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1.25 김태훈 여론독자부장)
남은 쉽게 의심해도 자기 자신은 의심하지 않는 게 인간 본성이다. SF 거장 필립 딕의 소설
'사기꾼 로봇'은 이런 인간성의 아이러니를 극적인 스토리로 드러낸 작품이다.
서기 2979년 지구는 외계 행성 센터루스의 침공에 시달린다. 지구수색대는 과학자 올햄을 센터루스가
보낸 복제 인간으로 지목해 제거하려 한다. 진짜 올햄은 살해됐고 가짜 올햄이 몸속에 지구를 파괴할
폭탄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올햄은 항변한다.
"폭탄을 터뜨릴 암호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복제 인간이란 말인가." 하지만 수색대에 쫓기던 올햄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시신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그 순간 올햄은 폭발한다.
자신에 대한 의심이 기폭 장치였던 것이다.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소설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너 자신을 의심하라.'
청와대 내부 문서가 박 대통령을 통해 최순실씨에게 넘어가고 최씨 일파가 국정을 농단하는 동안 대한민국
국정 운영 시스템은 사실상 작동하지 않았다. 사건의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 누구도 대통령이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국정 운영을 침해받지 않기 위해 고안된 모든 장치가 이 허점 앞에서 무너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지난해 3월 알프스산맥에서 추락한 저먼윙스 여객기 사고를 닮았다.
당시 부기장은 기장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조종실 문을 잠그고 여객기를 알프스 산록에 충돌시켰다.
비행기는 1만2000m를 8분간 강하했지만 아무도 조종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9·11 이후 테러로부터 조종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각종 안전장치가 문제였다.
그 장치들은 밖의 적을 막게만 돼 있을 뿐 내부에서 비롯되는 위험에는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2015년 3월24일 추락한 독일 저먼윙스 여객기의 기체 파편이 프랑스 남동부 디뉴레뱅 인근
산악 지역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AP 뉴시스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오다 노부나가는 확신에 찬 리더였다. 통일 대업을 자신이 완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가신(家臣)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을 받고 쓰러졌다.
아케치가 주군을 치기 전 부하들에게 한 말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지금도 시스템 내부의 취약성을 경계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최순실이 이번에 그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권한을 행사한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
그런 대통령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항의와 비난의 촛불이 주말 광화문을 뒤덮고 야당의 질타도 소리 높다.
하지만 그 함성 자체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이들의 목표일 수 없다.
최순실 사태가 드러낸 허술한 국정 운영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여야 한다.
저먼윙스 사고 이후 여러 항공사가 조종실에 최소 3명 이상 의무 탑승토록 하는 등 자신을 의심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보완했다.
우리도 비슷한 조치를 해야 한다.
그 조치는 허공에 사라질 백만 번의 함성이 아니라 "서면 보고를 받지 않겠다"는 대권 주자들의 선언이거나
헌법을 바꿔 제왕적 대통령제를 뜯어고치는 국가적 결단 등일 것이다.
그 노력은 여당도 해야 하지만 야권이 사심을 버리고 나서야 한다.
지금 박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무저갱을 향해 추락하는데도 야당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것을 야당은 유념해야 한다.
국민은 점령군가만 요란하게 부르는 세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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