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은 뒤 큰 홍수가 있으리니.”
18세기 중반 프랑스 루이 15세 통치 기간을 상징하는 말이다. 정치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여자 치마폭에 놀아나거나 도박하는 즐거움으로 살아가던 루이 15세가 ‘내가 죽은 후 프랑스가 퇴락하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투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앞서 선왕 루이 14세는 강력한 통치력으로 내란을 극복하고 프랑스를 유럽의 강국으로 키웠다. 그리고 다섯 살 증손자인 그를 세자로 책봉해 10년간 섭정했다. 마치 우리의 영조와 사도세자 관계처럼 말이다.
한데 루이 15세는 왕권을 쥐자마자 180도 달라졌다. 더는 골치 아픈 신하들과 강학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부와 권력을 쥔 태양왕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신민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신념만 가지면 됐다. 그는 국사를 드 플뢰리 총리에게 맡기고 여색, 도박, 파티에 몰두했다. 베르사유 궁전 지하통로와 비밀계단을 통해 예쁜 소녀들이 아무 때고 드나들었다. 그에겐 권태가 최대의 적이었다. 신하와 귀족은 왕에게 아첨만 하면 부와 권력이 보장된다는 걸 알았다.
후궁 퐁파두르는 비공식 총리였다. 그녀가 죽은 후 뒤를 이은 뒤 바리 부인은 단지 자신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무장관 수아죌을 파면했다. 빵집 딸에 불과했던 뒤 바리 주변엔 협잡꾼과 사기꾼이 넘쳤다. 그녀는 점성술과 신비주의로 인사를 좌지우지했다.
1774년 루이 15세가 죽었다. 신민은 루이 14세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새로운 왕 루이 16세의 개혁 아이콘은 왕비, 즉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미모의 그녀가 방탕한 궁중 분위기를 일소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녀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시민 모두 쏟아져 나와 그를 열렬히 맞았다. 놀란 앙투아네트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별다른 노력도 안 했는데 이렇게 사랑받는 자리에 와 있다니 너무나 기쁩니다.’
신민의 기대와 달리 왕과 왕비는 쾌락과 사치에 전념했다. 앙투아네트는 특히 베르사유 안의 작은 성 프티 트리아농에서 ‘에덴동산’ 놀이에 빠졌다. 자연 그대로의 정원을 꾸민다며 국고를 축냈고 농부들을 마음대로 동원했다. 가난한 농부 아낙들에게 실크 리본을 맨 양들을 보살피게 했다. 또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옷을 아낙들에게 입히고 고급 도자기로 소젖을 받도록 했다. 누가 봐도 별천지였으며 에덴동산의 재현이었다. 내 나라, 내 신민이라는 확고한 신념만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사치를 파고든 다이아몬드 사기꾼이 있었다. 사기꾼 재판 과정에서 왕비의 실상을 알게 된 신민은 분노했고 ‘적자 왕비’란 별명을 붙였다. 이 생각 없는 왕비는 소요가 일자 “평범한 시민들이 반항한다고 호들갑 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단두대에 서는 순간까지 내가 뭘 잘못했냐는 태도였다. ‘에덴동산’이 걱정될 뿐이었다.
우리 인간은 사물을 지성으로 붙잡는다. 그 붙잡힌 것이 개념이다. 젊은 세대가 자주 쓰는 관용구 ‘개념 없다’는 말을 풀어쓰자면 “너는 머리를 두고도 사고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된다.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태어나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죽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지 않으니 공동체와 함께해야 한다는 개념이 생길 리 없다.
봉건시대 왕은 개념 없이도 됐다. 사물이 자기 것인데 지성으로 붙잡을 필요가 없었다. 루이가(家)가 그랬다. 태양왕인데 생각 탑재가 왜 필요한가. 그러니 권태와 나르시시즘에 겨워 사치와 파티, 드라마를 즐길밖에.
하여 홍수가 나도 제대로 났다. 노아의 홍수와 같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말이다. 2017년 3월 10일 우리는 무혈 혁명을 이뤘다. 이제 국제질서 속에서 살아남는 대한민국호 방주가 필요하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종교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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