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속에서 홍길동은 나쁜 관리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좋은 뜻으로 한 행동이라고 해도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따라서, 남의 물건을 빼앗은 것에 대한 벌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초등학교 4학년 국어 1학기 7단원 253페이지)
지난해까지 초등학교 4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글이다. 이 글을 읽고 홍길동이 벌을 받아야 하는지, 칭찬을 받아야 하는지 토론해보라는 취지다. 홍길동은 약자의 시각에선 의적이고, 법치의 관점에선 도적이다. ‘악법도 법이다’로 대표되는 준법정신을 강조하고 싶다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펴야 한다. 분배를 통한 정의의 실현을 말하고 싶다면 ‘부패가 만연했고 조정은 백성의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변론을 해야 선생님에게 칭찬받을 수 있다. 시대 상황과 보는 각도에 따라 의적일 수도, 도적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현대 법치 사회에선 홍길동은 구속될 것이다. 하지만 현대판 홍길동은 합법의 담벼락을 탄다. 머리가 좋아 기발한 방식으로 대기업과 부유층을 압박해 협찬과 후원, 기부, 세금을 받아낸다. 요즘 홍길동은 권력과 대중적 인기까지 갖췄으니 그야말로 천하무적이다.
현대판 홍길동은 문재인 정부에서 맹활약 중이다. ‘대기업 저승사자’로 불렸던 김기식 전 국회의원은 피감 기관의 해외 출장을 챙기고 대기업에 강요해서 600만 원의 고액 대관 교육을 운영하다가 금융 검찰의 수장이 됐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책까지 냈던 박원순 서울시장은 과거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에서 거액의 후원금을 받아 논란이 됐는데도 어느덧 3선 시장에 도전 중이다. 경제민주화의 상징인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마침내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래서 재산 목록을 열어봤더니 보유한 주식의 가치만 50억 원 이상이었다. 대부분 대기업 상장사 주식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김 전 의원 보좌관 출신으로 대관 교육 수강생 모집에 개입했던 홍일표 청와대 행정관은 현재 장 실장 밑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에서 대한민국 최고 명문 사학으로 급부상한 ‘참여연대’의 동문이다. 동문 간엔 단단한 연대의식이 느껴진다. 홍 행정관은 2006년 포스코 지원으로 미국 연수를 갔는데, 당시 포스코 사외이사였던 박 시장이 미국행을 도왔다고 한다. 그의 상관인 장 실장은 지난 2015년 김 전 의원과 홍 행정관이 만든 대관 교육에서 2시간에 150만 원을 받고 강연을 했다. 참여연대 운영위 부위원장 등을 지냈고, 김 전 의원이 주도해 만든 연구소의 이사·강사로도 이름을 올린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김 전 의원을 두 차례 검증했으나 모두 합격 판정을 내렸다. 김 전 의원은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서 참여연대 등을 빼줬다. 까놓고 보니 홍길동들은 혼자 정의의 사도인 척 행세하더니 뒤에선 빼앗을 것은 빼앗고, 봐줄 것은 봐주고, 서로서로 챙겨가며 잘살고 있다.
세상 참, 먹고 살기 쉽다. 이 또한 삶의 지혜라면 지혜지만, 위선도 이런 위선이 없다. 하지만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홍길동의 가면도 검증의 테이블에 올라오면 어김없이 벗겨지더라. 2주 만에 금융감독원장에서 물러난 김 전 의원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my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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