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1.18 이한수 문화부 차장)
촛불 민심으로 탄생했다며 '차마 못 할 일' 자행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야만
6월 항쟁 독점도 안 될 일
이한수 문화부 차장
대학 2학년 때인 1987년 6월 서울시청 앞에 있었다. 학생회 지도부는 구호를 통일하자고 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로 민주 쟁취!" 일부에서 "제헌의회!"를 외쳤으나 이내 묻혔다.
학교 밖 가투(街鬪)는 불안했는데 그때는 달랐다.
평소 도서관에 있던 친구들이 보였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때 회현 고가차도 근처에서
최루탄에 머리를 맞을 뻔했다. 축대 맞고 터진 흰 가루를 뒤집어썼다.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기만 하면 민주주의는 절로 정착되리라 여겼다.
법과 제도만 갖추면 거리에서 목청 높이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30년 지나 '촛불 민심'으로 탄생했다는 정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국에선 요즘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온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와 대니얼 지블렛 교수는
트럼프 정부 출범 후 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첫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두 학자는 민주적 사회에서도 '선출된 독재자'가 포퓰리즘을 동원해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헌법과 제도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게 아니라고 했다.
상대를 인정하는 '상호 관용(mutual tolerance)'과 법적 권한을 신중히 사용하는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가
민주주의를 지탱한다고 강조했다.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정치적 반대자를 적폐로 규정해 먼지 날 때까지 터는 일 하지 않고, 임명 권한이 있다 해서
측근이나 부적절한 인사를 사법부 고위직과 장관 따위 자리에 앉히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두 하버드대 교수의 성찰은 2300년 전 동양 고전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맹자는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不忍人之政]'를 말했다.
제대로 된 정치라면 명예를 생명으로 여기는 군 장성에게 모욕을 안겨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한다.
권력과 조직 내부 문제를 세상에 알린 이들의 인격을 모독하며 검찰에 고발하는 일 따위는 차마 하지 못한다.
"목적은 돈"이라며 내부 제보자 공격에 앞장섰던 여당 의원은 목포 어느 지역이 문화재 거리로 등록되기 전
친척·지인 명의로 해당 지역 건물을 최소 15채 산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투기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이미 숱하게 조짐이 있었다.
자신도 불법 위장전입을 했으면서 위장전입 피의자에게 징역형을 내린 판사,
역시 자신도 위장전입자이면서 전 정권 장관 후보자의 위장전입 사실을 공격한 인사가 정권 바뀐 후 대법관이 되고
장관 자리에 앉는 일 따위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런 인사를 골라내야 할 임명권자는 "청문회 때 시달린 분이 일을 더 잘한다"고 법과 제도를 조롱했다.
사람은 누구나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있다고 맹자는 말했다.
이른바 성선(性善)이다. 지금껏 벌어진 일을 보면 맹자는 틀렸다.
'거래의 기술'을 앞세우는 트럼프 정부는 그렇다 치고
6월 항쟁 정신을 계승했다는 정부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말하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덕분에 교훈을 얻었다.
민주주의는 좌우(左右)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서슴지 않고 하는 권력은 좌든 우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야만이다.
그러면서 6월 항쟁과 민주주의를 독점한 양 들먹이는 행태는 더욱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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