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서훈 논란으로 명확히 알게 됐다. 영화 ‘암살’이 그렸던 김구와 김원봉의 협력은 후세대 영화인이 픽션으로 그린 꿈이라는 것. 이번 논란을 계기로 ‘백범일지’를 다시 보니, 김구는 약산 김원봉이 항저우(杭州)임시정부 파괴에 나섰다고 기록했다. “임시정부를 눈엣가시로 보는 의열단원 김두봉·김약산”이라는 표현은 당시 김구 심정을 그대로 대변한다.(돌베개출판사 ‘백범일지’ 357∼359쪽)
1940년 충칭(重慶)으로 임시정부를 옮긴 후 김구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을 찾아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해 민족주의 단일 정당을 만들 것을 제의한다. 그래서 이른바 7당 통일회의가 열렸으나 공산주의 진영의 반발로 5당으로 축소됐다. 그마저도 김원봉 측이 돌연 탈퇴를 선언하는 바람에 합치지 못했다.(377∼381쪽) 김구는 충칭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훈련한 것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지만, 광복군에 합류한 김원봉에 대해선 그가 제1지대장이며 휘하에 50명이 있다는 것 이외에 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394쪽)
영화에서의 꿈은, 픽션 아트의 자유로 인정받아야 하나 팩트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분투한 것은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러나 광복군에의 기여를 과장하거나 해방 후 북에서의 행적에 눈을 감겠다는 태도는 옳지 않다. 냉전 사고를 벗어나자는 주장은 일리 있으나, 분단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억지다.
이번 논란을 통해 김원봉이 1948년 최고인민회의에서 ‘경애하는 우리 민족의 영명한 지도자’라며 김일성을 찬양한 기록이 있음을 알게 됐다. 항일 영웅이 소련의 힘을 등에 업고 평양에 등장했던 30대 ‘지도자’에게 이렇게 고개를 숙였는데도 숙청을 당해 사라졌다.
김일성이 왕조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김원봉 같은 정치 인물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인들도 치욕을 겪어야 했다. 오는 7월 3일 서울시가 주관하는 문학기행 주인공인 백석 시인도 북의 왕조 체제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다.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만주에서 걸작시를 썼던 그는 해방이 되자 고향인 평북 정주에 갔다가 북에 남게 된다.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평전’에 의하면, 백석은 1912년생으로 동갑인 김일성 귀국 환영연에 참석해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는 김일성이 스승인 조만식을 숙청하자, 시를 쓰는 붓을 놓고 외국 문학 번역에 몰두한다. 체제 옹호 문학과 거리를 두기 위해 동화시(童話詩)를 창안했던 그의 태도는 유배를 부른다. 오지를 표현할 때 쓰는 ‘삼수갑산’의 그 삼수군 협동농장으로 쫓겨 간 그는 거기서 체제를 떠받들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쓴다. “아버지 원수님의/ 그 어린 시절에 영광”을 돌리고 “세기의 죄악의 마귀인 미제”라고 규탄했다. 자식 셋을 둔 아비로서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쳤으나, 결국 복권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최근 국내에 소개된 미국 작가 기행서 ‘시-유 어게인 IN 평양’은 북한을 편견 없이 보지만 김일성 왕조의 광신 분위기가 김정은 시대에도 지속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과 대화를 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체제가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다름에 눈을 감는 ‘우리 민족끼리’는 몽상일 뿐이다.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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