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1407

[백영옥의 말과 글] [319] 공감이 힘든 이유

조선일보 2023. 9. 2. 03:00 독서광으로 알려진 빌 게이츠가 평생 읽은 책 중 가장 중요하다고 꼽은 것은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다. 1400페이지가 넘는 이 벽돌 책은 학문을 통섭하는 방대한 자료를 통해 과거에 비해 우리 사회의 폭력이 얼마나 감소했는지 추적 관찰한다.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더 나아가 다양한 통계를 통해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덜 폭력적이라는 증거를 제시한다. 내 의문은 이 많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왜 폭력이 ‘전혀’ 줄지 않았으며 오히려 늘고 있다고 생각할까 하는 점이다. 학교 폭력 뉴스가 뜰 때마다 “우리 때는 저 정도는 아니지 않았어?”라고 사람들은 되묻는다. 과거의 기억이 연한 아메리카노라면 현재의 기억은 진한 에스프레소에 가깝기 때..

[백영옥의 말과 글] [318] 아직 서로에게 배울 게 많다

조선일보 2023. 8. 26. 03:03 야근이 당연하던 시절의 세대가 보기엔 MZ 세대는 권리만 있고 의무는 잊은 세대다. 긴급 상황에도 ‘칼퇴’를 외치고 정당한 업무 지시에도 ‘꼰대’ 딱지를 붙인다며 억울해한다. MZ 세대가 보기에 경제성장기에 태어나 자산을 독차지한 위 세대는 탐욕의 화신에 자기 무능력을 종종 팀원에게 떠미는 ‘월급 루팡’이다. 세계를 여행하면 대한민국처럼 현수막이 많은 곳을 찾기 어렵다. 각자 알려야 할 게 너무 많은 탓이다. 좋게 보면 활력이고, 나쁘게 보면 억울한 갈등이 많은 나라다. ‘갈등’은 칡을 뜻하는 ‘갈(葛)’과 등나무를 뜻하는 ‘등(藤)’ 덩굴이 엉망으로 뒤엉킨 상태를 말한다. 갈등이 쾌도난마로 단칼에 해결되기는 어렵다. 폭력을 저지르고도 선한 척 살거나, 일 잘하..

[백영옥의 말과 글] [317] 뜻밖에 남 탓이 도움이 될 때

조선일보 2023. 8. 19. 03:01 소설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인간의 창의성이 신성한 혼, ‘지니어스(Genius)’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천재성이 인간에게 나오는 게 아니라, 우렁각시나 지니처럼 어딘가 숨어 있다가 우리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예술가들은 작품이 형편없을 때, 자기 비하 대신 지니어스가 돕지 않아서 망했다고 푸념할 수 있었다. 삶에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아무리 준비해도 시험에 떨어질 수 있고, 죽어라 노력해도 대회를 망칠 수 있다.....농사를 망친 농부가 비를 내려주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듯, 닫힌 창을 열고 내 밖에 존재하는 것에 기댈 수 있어야 한다. 지독한 고난에 처했을 때, 종교는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

[함영준의 마음PT] “바쁜 일상 속에서 스스로 알아차리는 습관”-영국 영적 교사가 전하는 행복의 비결

조선일보 2023. 8. 15. 05:50 그는 세계적인 도예가였다. 영국 유명 뮤지엄에서 그의 작품들을 영구 콜렉션했으며 1999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해서 우리 대통령에게 준 선물이 바로 그의 도예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제 작품 활동을 완전히 접고 집필, 명상 지도, 영적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루퍼트 스파이라(Rupert Spira). 1960년 영국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인도 철학과 명상에 눈을 떠 깊은 연구와 수행을 해왔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하면 평화롭고 행복한 인생을 얻을 수 있나?’라는 삶의 본질적 문제를 아주 쉬운 말과 비유로 설명한다. 그러나 명상 등 마음수련 훈련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좀 알쏭달쏭하게 들릴 수도 있다. 최근 번역돼 나..

[백영옥의 말과 글] [316] 마약과 유혈낭자 사회

조선일보 2023. 8. 12. 03:02 법무부 유튜브에 들어갔다가 마약 중독 치료만 수십년을 한 정신과 전문의 천영훈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요즘 일요일도 없이 일해야 할 정도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10여 년 전만 해도 중년의 남자가 모텔에서 혼자 투약하던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비해, 이제 파티룸 같은 걸 빌려 그룹으로 약을 하는 젊은층이 급증하고 있다고 했다. 약에 중독된 한 아이에게 꿈을 물으니 “어른들에게 사기를 많이 당해서 정직해지는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그의 뒷말은 참담했다. “정직한 딜러가 되어 양질의 마약을 공급하는 것”이 아이의 포부였기 때문이다.....이 나라에 살면서 마약 딜러가 청소년의 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이것은 한 아이의 실패가 아니라 ..

[염재호 칼럼] 의대 열풍과 다양성 실종의 위험

중앙일보 2023. 8. 9. 00:58 급변하는 사회, 인기 직업도 변화 미래 읽지 못하는 자녀 교육 열풍 디지털 혁명으로 의료체계 변화 다양성으로 미래 사회 준비해야 의대 진학 열풍이 불고 있다. 초등학생 네 명 중 한 명이 의대 진학을 희망한다고 한다. 학원가에서는 초중등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대입시반이 성행 중이다. 지역대학이 위기라고 하지만 의대만은 예외다. 정시모집에서 부산의 한 의대는 지난해 33 대 1, 대구의 한 의대는 29 대 1로 이삼년 사이에 지원율이 세 배 이상 높아졌다. 우리나라 의사의 연봉이 OECD 최고수준이라고 한다. 게다가 의사면허는 자격증이기에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는 전문직에 속한다. 따라서 의사가 되기 위한 힘든 수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평생 전문가로서 대접을 받고..

[백영옥의 말과 글] [314] 교사에게 훈육을 빼앗는 사회

조선일보 2023. 7. 29. 03:00 기억에 남는 강연이 있다. 중학생 대상 강연이었는데 90분 내내 아이들이 쉬지 않고 떠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놀란 건 교사의 통제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혼이 빠진 내게 다가온 선생님의 사과가 마음에 남는 건, 지친 얼굴 속에 보인 지독한 무기력함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의 극단적 선택에 대한 기사를 읽은 후, 그때의 일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다. 교권은 교사에게 주어진 기본적 노동권으로, 퇴근 이후 사생활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포함한다. 많은 경우 학부모가 항의한 ‘내용’만큼 표현의 ‘형식’이 부적절하다는 게 정말 큰 문제다. 부모에게 내 아이는 특별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과잉될 때 사회문제가 된다. 북유럽에는 ‘얀테의 법..

[유석재의 돌발史전] 여전히 히딩크가 그리운 이유

조선일보 2023. 7. 28. 00:00 그는 21년 전 ‘人事의 원칙’을 일깨웠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히딩크 감독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 중 가장 커다란 것은 한국팀의 4강 진출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원칙의 소중함’이었습니다. 그는 선수의 지명도와 위계질서를 배제하고 철저한 실력과 잠재력의 검증을 통해서 발탁했으며, 온갖 친연(親緣)관계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명쾌하면서도 지당(至當)한 영역의 담론입니다. 히딩크를 거꾸로 뒤집어보면 그때까지 우리 축구계의 대표선수 발탁은 온갖 비(非)스포츠적인 요소의 언저리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대중적인 인기와 온갖 연고(緣故)의 작용 말입니다. 어찌 축구뿐이겠습니까. 우리 사회 전체가 다 ‘말로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