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1408

[유석재의 돌발史전] 여전히 히딩크가 그리운 이유

조선일보 2023. 7. 28. 00:00 그는 21년 전 ‘人事의 원칙’을 일깨웠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히딩크 감독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 중 가장 커다란 것은 한국팀의 4강 진출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원칙의 소중함’이었습니다. 그는 선수의 지명도와 위계질서를 배제하고 철저한 실력과 잠재력의 검증을 통해서 발탁했으며, 온갖 친연(親緣)관계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명쾌하면서도 지당(至當)한 영역의 담론입니다. 히딩크를 거꾸로 뒤집어보면 그때까지 우리 축구계의 대표선수 발탁은 온갖 비(非)스포츠적인 요소의 언저리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대중적인 인기와 온갖 연고(緣故)의 작용 말입니다. 어찌 축구뿐이겠습니까. 우리 사회 전체가 다 ‘말로만 ..

[백영옥의 말과 글] [313] 히딩크의 첫 번째 별명

조선일보 2023. 7. 22. 03:02 인턴 사원으로 6개월간 최선을 다했는데도 정규직으로 채용되지 못한 지인의 딸이 우울해 한다는 말을 들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색한 실망이었다.....사실 노력한 만큼 실력이 쭉쭉 느는 시기는 초심자 시절뿐이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면 노력한다고 해도 바로 실력이 늘지 않는다. 모소 대나무는 4년 동안 고작 몇㎝ 정도 자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길고 긴 4년을 견디고 나면 6주 만에 15m까지 자란다.....중요한 건 모소 대나무가 견딘 4년이다. 모소 대나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계속 ‘어두운 땅속으로’ 길고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히딩크가 국가대표 팀 감독이 됐을 때, 그는 프랑스나 체코 같은 강팀과 붙어 연달아 5대0 ..

[백영옥의 말과 글] [312] 소설을 읽는 이유

조선일보 2023. 7. 15. 03:04 집중력 저하 때문에 고민이 많다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내 경우 스마트폰이 이유인데, 얼마 전 타이머가 달린 휴대폰 금고를 샀을 정도다. 만약 새로 산 GPS가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나를 인도한다면 계속 사용할 수 있을까.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접속한 인터넷에서 우리는 대부분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을 배회한다. 애초의 목적과 상관없는 콘텐츠를 보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요한 하리의 책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책이 아니라 화면으로 글을 볼 때 사람들이 내용을 훨씬 적게 기억하고, 대충 본다는 것이다.....이 책을 읽다가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에 대한 공감이 급속히 줄어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소설을 많이 읽..

[백영옥의 말과 글] [311] 나를 사랑하는 법

조선일보 2023. 7. 8. 03:02 내가 투자의 현인(賢人) 워런 버핏의 그림자에 가려져 2인자로 살았던 찰리 멍거에게 열광하게 된 건, 그의 특별한 사고체계 때문이었다. 그는 기업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고 싶을 때 그 기업이 파산하거나 무너지면 어떻게 될지부터 생각했다. 행복해지려면 불행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데 더 몰입했다. 변화의 속도로 불안이 디폴트 값이 된 시대에 귀중한 삶의 기술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다.....혹여 깨질까 봐 쓰지 못하는 걱정은 ‘나 자신’을 귀한 손님으로 환대하는 마음으로 덮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 미모, 명석함도 언젠가는 손님처럼 내 몸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을 ..

[백영옥의 말과 글] [310] 깊이에서 오는 충만감

조선일보 2023. 7. 1. 03:02 ........우리가 여전히 사랑니처럼 불필요한 기관을 달고 사는 건 진화의 느린 속도 때문이다. 먹을 수 있을 때 양껏 먹어야 굶어 죽지 않는다는 원시인의 뇌가 아직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다가 맹수에게 물어뜯길까 봐 경계하는 건 원시 시대에 어울린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안을 벗어나, 반대편에 있는 충분함을 알아차리는 기술이다. 우리는 주로 직업이나 나이, 삶의 방식이 비슷한 사람을 시기한다. 작가는 작가를, 정치인은 정치인을 시기한다. 걸인 또한 부자보다는 자신보다 형편이 조금 나은 걸인을 시기한다고 한다. 불만족을 유발하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책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여러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큰 충분함은 한 권의..

[백영옥의 말과 글] [309] 달리기 위해 멈추고, 채우기 위해 비워야 한다

조선일보 2023. 6. 24. 03:01 농사를 지은 땅의 지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쉬는 땅을 휴경지(休耕地)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인삼밭이 그렇다. 인삼을 재배하고 나면 몇 년은 휴경한다고 한다. ‘해거리’라는 말도 있다. 과실이 한 해에 많이 열리면 그다음 해에 결실량이 현격히 줄어드는 현상을 말하는데,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처럼 우리가 아는 많은 나무가 해거리를 한다. 해거리는 정신없이 달리다가 천천히 한 해를 쉬는 ‘나무들의 안식년’인 셈이다. 해거리를 방지하고자 이들이 하는 일이 ‘가지치기’다....‘해거리’와 ‘가지치기’는 ‘힘과 쉼’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양면의 지혜다.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멈추고, 더 가득 채우기 위해 비우는 자연과 인간 모두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힘과 쉼 역시 그렇다...

[백영옥의 말과 글] [308]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조선일보 2023. 6. 17. 03:04 지난주 공원 벤치 앞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이 언쟁하는 소리를 들었다. 세 아이 중 한 명은 중재 중이었고 두 명은 계속 언쟁을 이어갔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은 “지금 너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내가 트라우마가 생겼어!”라는 말이었다. ‘스트레스’라는 말까진 이해가 됐지만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다소 놀라웠다. 요즘은 어린이들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 참 거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정신과 하지현 교수의 책 ‘그렇다면 정상입니다’에는 ‘생활기스’라는 말이 등장한다....인생에서 작은 상처도 받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상처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도 찾아온다. 피가 꽃이 되는 마법처럼. https://v.dau..

[만물상] 한국인 없는 K팝 그룹 탄생

조선일보 2023. 6. 15. 00:10 수정 2023. 6. 15. 00:14 1990년대를 풍미했던 보이 그룹 H.O.T는 결성 당시 해외 진출을 고려하지 않았다.....재미교포 유진과 재일교포 슈를 발굴해 내놓은 첫 작품이 걸그룹 S.E.S였다. 슈를 앞세워 일본에 진출했고 대만에선 가장 인기 있는 걸그룹이 됐다. K팝 열풍의 시작이었다. 마침내 한국인이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K팝 그룹이 등장하는 ‘K팝 3.0′ 시대가 열렸다.....이들의 출신국은 K팝이 시장 확장을 노리고 있는 지역들이기도 하다. ▶‘한국인이 부르거나 한국어로 불러야 K팝’이란 정의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 누가, 무슨 언어로 부르건 ‘화려한 칼군무에 맞춰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게 노래하고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게 K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