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自然과 動.植物

[커버스토리] 가녀려 어여쁘네 … 은밀히 유혹하네

바람아님 2015. 8. 16. 09:47

[중앙일보] 입력 2015.08.14

야생화 탐방












 
이른 아침 백두대간이 지나는 만항재 숲. 여기는 자연 그대로의 숲이고, 아래에 야생화 공원이 있다.

 만항재에서 금대봉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국내 최대의 야생화 군락지다.

 사진 아래 붉은 꽃은 동자꽃.

지난달 말 이른 아침. 강원도 정선 만항재는 새벽 안개가 자욱했다. 아니다. 해발고도 1330m 위에 있으니 안개라기보다는 구름이 맞겠다. 구름에 갇힌 백두대간의 고개는 신비로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 어두운 새벽 숲에서 빨갛고 노랗고 하얀 점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꽃망울 터뜨린 여름 야생화였다.

동트기 전에 이 고개를 오른 지 십 년이 넘는다. 애오라지 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만항재에는 이 땅에서 나는 온갖 종류의 야생화가 있다. 사람이 부러 조성한 꽃밭도 있지만, 애초부터 이 고개는 야생화가 천지였다. 사람이 들기 한참 전부터 고개의 주인은 들꽃이었다.

야생화 보러 가는 여행은 수고스럽다. 우리 꽃은 하나같이 작고 여려서, 실바람 한 줄기에도 온몸을 뒤척인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다른 생명을 해칠 수 있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허리를 굽혀서 안 되면 무릎을 꿇어야 하고, 무릎을 꿇어도 안 되면 오체투지라도 하듯이 엎드려야 한다. 그래야 겨우 야생화와 눈을 마주칠 수 있다. 내가 먼저 나를 낮춰야 한다. 그래야 야생화 세상 안에 한 발 들여놓을 수 있다. 새벽잠 설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해마다 나서는 걸음이지만, 올 여름에는 의미가 각별하다. 지난해부터 정부가 야생화 사업을 벌이고 있어서다. 환경부·문화체육관광부·농림축산식품부·산림청 등 4개 부처가 일제히 사업을 펼친다. 관련 예산도 87억원이나 된다. 문체부의 지원 아래 전국 10개 자치단체가 야생화단지를 만들고 있으며, 관광공사는 청와대 앞 광장에 야생화 화단을 꾸몄다. 청와대 홍보관 ‘사랑채’ 안에서 야생화 전시회도 열었다. 충남 서천 국립생태원도 야생화단지 조성사업을 시작했고, 방방곡곡의 자연휴양림에도 야생화 벨트가 만들어지는 참이다.

반가운 소식이긴 한데, 이해되지 않는 구석도 있다. 생태관광은 정부가 생색내기 어려운 사업이어서다. 카지노처럼 대규모 개발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성과가 금방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정부는 해를 이어 꽃 타령이다. 그것도 우리 꽃만 콕 집어서 노래를 부른다.

최근에야 저간의 사정을 들었다. “대통령 관심사항”이라는 관광부처 공무원의 실토가 있었다. 그랬구나, 대통령이 꽃을 좋아하는구나. 장미·튤립처럼 크고 화려한 서양 꽃이 아니라, 구절초·하늘나리처럼 작지만 어여쁜 우리 꽃을 좋아하는구나. 꽃을 좋아하는 대통령이라. 총을 좋아하는 대통령보다야 낫지 않은가.

인간은 눈앞에 핀 꽃만 좋아한다. 꽃만 좋아할 줄 알지, 꽃이 피기까지의 내력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여름 야생화를 보고도 야생화의 봄 시절은 떠올리지 못한다. 여름 야생화 대부분은 봄에 나물이었다. 곰취·참취·단풍취 등 취나물 종류부터 짚신나물·물레나물·솔나물·나비나물 등 온갖 나물류, 두메담배풀·석잠풀·층층이꽃 같은 흔치 않은 들꽃까지, 잎사귀가 아직 어린 계절에 그들은 우리에게 음식이었다. 인간에게 뜯기지 않고 한 계절을 살아낸 덕분에 그들은 다음 계절 꽃이 되어 인간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야생화 보러 가는 여행은, 한 생명의 가장 눈부신 찰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생명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는 여행이어서 어느 여행보다 더디고 느린 여행이다. 나라가 야생화를 관광자원으로 가꾸겠다고 하니 기꺼운 마음으로 들려주는 당부이자 충고다.


글=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