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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화 기행] (13) 색과 소리로 세상을 연주했던 작곡가, 아란후에스에 묻히다

바람아님 2013. 8. 23. 13:00
스페인 아란후에스
어릴적 병으로 시력을 잃은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
어머니의 회한서 영감을 얻은 '아란후에스 협주곡' 2악장
폭격의 비극에 빠진 국민들은 그 아름다운 선율에 열광

 

               


여느 아이들처럼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찬 세 살배기(우리식으로는 네 살)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 본능적 호기심은

예기치 않은 운명의 장난으로 파국을 맞았다. 디프테리아 합병증으로 안구 근육이 마비된 것이다. 병에서 회복돼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마치 뿌연 안개 속에 갇힌 것 같았다.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단색조의 핑크빛으로 다가왔고

그 따뜻한 색조는 아이에게 무한한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창밖으로 내다본 하늘은 낮에는 푸른색으로 보이다 저녁이면

오렌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남들이 형체로 세상을 파악할 때 아이는 색채와 소리로 세상을 파악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도 잠시.안타깝게도

아이의 눈앞엔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검은색 커튼이 드리워졌다.

이제는 소리로만 세상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예전에 눈앞에서 명멸했던 아름다운 색채들이

떠올랐다. 새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면 녹색,어머니의 음성을 들을 때면 핑크색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과 달리 그는 소리를 풍성한 색채로도 느낄 수 있었다.

 


여덟 살이 되자,어머니는 아이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바깥 세계를 보는 눈 대신

내면의 눈을 갖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은 마침내 열매를 맺어 프랑스에

유학한 아이는 전도유망한 작곡가가 됐다.

이 마음의 눈을 가졌던 인물이 바로 20세기 최고의 걸작 '아란후에스 협주곡'을 작곡한

스페인 음악가 호아킨 로드리고(1901~1999)다. 이 곡의 이름은 몰라도 멜로디를 한 번쯤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시력을 잃은 지 30년이 지난 어느 봄날 로드리고는 신혼의 부인 빅토리아와 함께 아란후에스

왕궁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부인의 손에 이끌려 왕자의 정원을 산책하던 그의 귀에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숲속에서 들었던 새소리가 들렸다. 산들바람을 타고 온 매그놀리아 꽃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순간 로드리고의 뇌리엔 아들의 실명을 두고두고 애통해 하던

어머니의 회한이 그 아름다운 풍경 위에 오버랩됐다.

그는 이날 스페인 왕가의 정원에서 느낀 감정을 무너져가던 한 왕조의 우울한 분위기와 함께 오선지에 옮겨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 '아란후에스 협주곡'을 발표한다. 1악장에서는 경쾌하고 밝은 리듬이 민속음악의 뉘앙스를 풍기며 전개되고,

2악장에선 아라비아풍의 애조 띤 잉글리시 호른과 기타의 선율이 대화하듯 교차한다. 경쾌한 로코코풍으로 전개되는 3악장은

듣는 이로 하여금 궁정 무도회에 참석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모국인 스페인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2차대전 이후 로드리고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줬다.

특히 2악장 아다지오는 음악사가들에 의해 20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선율로 평가될 만큼 격찬을 받았다.

로드리고는 아름답고 애조 띤 아다지오의 탄생 배경을 오래도록 밝히지 않았다. 참혹한 전화가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던 시절 자신의 개인적인 창작동기를 앞세워 스페인 국민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빅토리아가 만년에 쓴 자서전 《호아킨 로드리고의 손을 잡고》에서 밝히기 전까지 2악장 아다지오의 애조 띤 선율을

1937년 프랑코 총통이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독일군과 연대해 저지른 게르니카 폭격의 비극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믿었다.

작품의 배경이 된 아란후에스는 도시 전체가 스페인 왕실의 휴양을 위한 별궁으로 조성된 곳이다. 마드리드와 톨레도의 중간에

있는 아란후에스 궁전은 16세기 중반 필리페 2세 때 공사가 시작돼 18세기 후반 카롤로스 3세 때 완성됐다.

베르사유를 본떠 지은 이곳은 도시 구조도 궁전을 중심으로 태양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은 방사상으로 조성됐다.

섬의 정원,뱃놀이의 집,왕자의 정원,농부의 집 등 아란후에스 궁전과 정원의 중요한 볼거리는 대부분 왕궁 북쪽,레이나

거리의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중 왕자의 정원은 1763년 카롤로스 4세가 프랑스 건축가를 초빙해 만든 것으로 규모가 150만㎡에 달한다. 농부의 집은 이름과 달리 왕실의 소궁전이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로코코식의 가구들과 비단 자수가 보는 이의 시선을 자극한다.

아란후에스의 진면목은 궁전 건축보다는 건물을 둘러싼 방대한 정원에 있다. 건물들과 마찬

가지로 정원도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 조경도 기하학적 미감을 살린 프랑스식 형식주의

정원이 채택됐는데 이는 프랑스에 뿌리를 둔 스페인 왕가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루이 14세가 추구한 절대군주제의 이념을 반영한 형식주의 정원은 차가운 기하학적

인 형태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무들을 직선적으로 전지(가지치기)하는 게 특징인데

자연적인 미감을 추구한 동양인의 정서에는 다소 맞지 않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로드리고가 부인과 함께 이 정원을 거닐었을 때 차가운 형식주의 정원을 본 것이 아니라

새소리,풀벌레 소리,미풍과 그것에 실려온 꽃향기 같은 자연의 숨결,그 위로 오버랩되는 자연의

아름다운 색채를 온몸으로 느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연의 외형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눈으로

바라본 자연의 본질이었다. 그 점에서 로드리고는 결코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외형에 집착하는 우리 모두가 시각장애인은 아닐까. '아란후에스 협주곡'은 그 살아 있는

증거다.


정석범 미술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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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범 박사의 기행문을 읽고나서]

 

나는 그동안 여러편의 정석범 박사의 '해외문화기행'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언제나 정 박사의 현란한 필체는 오늘 이야기한 '마음의 눈'을 나에게도 선사해 준다.

 

모든 사람들이 예술을 대하며 다 느꼈듯이 '예술은 하나다'. 그것이 음악이던 회화던,조각이던, 문학이던,책이던 .........

음악을 들을때는 마음속에 그림이 그려지고 이야기가 써지며, 회화나 조각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으로 글이 써져 그림을

책을 읽듯이 읽어 내려가고, 문학이나 책을 읽을 때면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려 지는 것이다.

즉 작가가 만들어 내는 것은 현재 눈앞에 보여지는 것만이 아니고 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 작품을 글로 엮거나 그림을 그릴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든다.

그림과 음악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이야기를 쓴 책속에는 그림과 음악이 숨어 있다.

 

그런면에서 정 박사의 기행문은 매우 훌륭하며 한편을 읽고 나면 한편의 영화를 보고 영화관문을 나서는 기분이다.

                                                                                                                                           (바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