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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창의문 지나 수성동·세심대… 겸재의 화폭 속을 거닐다

바람아님 2013. 8. 30. 11:17

겸재 정선과 서울 西村여행

         
               지난 30일 ‘길 위의 인문학’ 탐방객들이 겸재 정선의 작품 무대가 된 서울
               종로구 옥인동 수성동 계곡을 둘러보고 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의 경치, 관념이 아닌 관찰을 바탕으로 한 그림, 조선 중기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에서 한국 고유의 풍경화 화풍(畵風)은 비로소 꽃을 피웠다.

 

 

 



지난 30일 조선일보와 국립중앙도서관·교보문고 공동 주최로 열린 '길 위의 인문학' 올해 첫 번째 주제는 '겸재 정선을 따라가는

250년 전 한양 여행'. 겸재의 진경산수화 배경이 된 장소 중 서울 서촌(西村) 지역을 둘러봤다. 48명의 탐방객들은 겸재의

그림을 수록한 '겸재 정선-붓으로 펼친 천지조화'(국립중앙박물관) 책과 자료집을 들고 그림과 실경(實景)을 번갈아 보며 창의

문~겸재 집터~청풍계~세심대~수성동~필운대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해설을 맡았다.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서촌은 궁궐과 관청,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이 인접해 산과 도심이 병존하는 동네다. 겸재가

태어난 곳도 현재 경복고등학교가 있는 북악산 기슭 유란동(幽蘭洞). 겸재는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 명소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화첩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을 남겼다.

장동팔경 따라가는 여행

인왕산과 북악산 자락이 만나는 곳에 창의문(彰義門)은 자리하고 있다. 겸재 그림 속 창의문은 우거진 송림(松林)과 골짜기,

굽이치는 유선형의 계곡과 함께 산수의 일부 같다. 창의문 너머로는 붓을 종이에 비비며 거칠게 쓸어내려 표현한 북악산의

어깨도 보인다. 그 옆에 앙증맞게 붙어 있는 부침바위도 겸재는 놓치지 않았다. 윤 연구원은 "관찰을 바탕으로 한 실경에 화가의

감정과 지식을 불어넣어야 진경산수화가 완성된다"고 했다.

       탐방객들이 겸재 그림이 담긴 책을 펼친 채 서촌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그림 속 평화로운 정취와는 달리, 창의문은 그동안 소외된 장소였다. 사람이 드나들면 지맥(地脈)이 상한다는 풍수지리학적

 이유로 수백 년간 문이 닫혔고, 인적이 끊긴 땅엔 소나무만 무성했다. 비가 올 듯 하늘은 먹빛이었다. '의로움을 드러낸다'는

 창의문의 뜻과 그림 속 적막을 음미하며 탐방객들은 발길을 돌렸다.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자하문로28길을 따라 내려가면 경복고가 보이고, 교내에 겸재 생가(生家)임을 알리는

기념석이 있다. 기념석엔 겸재의 그림 '독서여가(讀書餘暇)'가 새겨져 있다. 윤 연구원은 "겸재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그림"

이라고 했다. 안동 김씨가 모여 살던 이곳에서 겸재는 김창협, 김창흡 등의 문하에 드나들며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진경시(眞景詩)를 접했고, 고유의 화풍을 만들었다. 탐방객들은 난초향 그윽한 유란동 집 툇마루에 부채 쥐고 앉은 선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성동 계곡, 겸재 그림 바탕으로 복원

겸재 화폭 속 심산유곡(深山幽谷)은 이제 간데없다. 콘크리트로 복개되고, 주택과 학교가 들어서면서 풍경이 크게 달라졌다.

종로구 청운동 '청풍계(淸風溪)'를 향해 10여 분간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면 큰 바위 하나가 나온다. 우의정 김상용(1561~1637)

집터 앞이다. 바위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 선비의 고고한 순절을 상징한다.

겸재는 깊숙한 계곡과 산자락을 표현하기 위해 세로로 긴 화면에 풍경들을 쌓아올리듯 그렸다. 붓끝 농담(濃淡)으로 빽빽이

채워진 그림 속 녹음 대신 지금은 고급 주택이 들어서 있다.

        겸재가 1751년쯤 그린
       ‘수성동’(간송미술관 제공).

종로구 옥인동 좁은 주택가를 걸어 들어가다 보면 나오는 수성동(水聲洞) 계곡도 얼마 전까진 콘크리트로 덮여 있었다.

물소리로 이름난 이 계곡은 1971년 옥인동 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계곡 암반이 콘크리트로 덮였다. 2008년 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이곳의 역사적 가치가 재평가돼 복원이 시작됐고, 지난해 7월 자연상태로 되돌려져 일반 시민에게 개방됐다. 복원

사업의 근거는 겸재의 그림 '수성동'이었다. 그림 속 크고 둥근 바위, 미점법(米點法·크고 작은 점들을 찍어 형태를 묘사하는

기법)으로 슥슥 그려진 수풀, 계곡물이 실물로 되살아났다. 그림 속 선비들이 걸어가던 다리도 복원됐다. 다리는 '一'자 모양으

로, 화선지를 누르는 서진(書鎭)처럼 생겼다. '기린교(麒麟橋)'다. 시멘트에 묻혀 있던 것을 정으로 쪼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렸다.

필운대(弼雲臺)는 배화여고 매점 뒤편에 있다. '필운'은 조선시대 공신 이항복의 호(號)로, 필운대는 이항복의 집터이기도 하다.

살구꽃으로 유명한 초봄 꽃구경 명소다. 정조 임금이 '운대의 곳곳마다 번화함을 과시하라'고 시를 지어 노래할 정도였다.

겸재도 이곳에 걸터앉아 한양을 내려다보며 대나무 숲을 그렸다. 당시 인왕산과 북악산·남산이 한눈에 들어왔던 탁 트인

조망권은 이제 건물에 막혀 사라졌다.

"그림에 들어갔다 나오다"

'마음을 씻는 곳'이라는 세심대(洗心臺). 종로구 신교동 서울농학교 뒤편으로 10여분 올라가면 평평한 땅에 정자 하나가 버티고

서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마른 붓처럼 꼿꼿이 선 나목(裸木)과 남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탐방객 윤용황(78)씨가 가쁜

숨을 뱉으며 "올라온 보람이 있다"고 했다. 윤 연구원이 "정조는 매년 이곳에 오르며 60세가 넘은 신하에겐 지팡이를 하사했다"

고 하자, 한 참가자가 "60세면 한창때"라며 되받았다.

윤 연구원은 "겸재의 대표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도 세심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고 했다. 안개 낀 인왕산 중턱 소나무

우거진 곳, 누군가의 집 기와지붕 윗부분이 바로 세심대라는 것. 김하연(13)양은 "서울엔 궁궐이나 종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정말 신기하다" 했고, 파키스탄 유학생 오메르 살만(26)씨는 "한국 전통 그림에 나오는 장소를 다녀보니 내가 그림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오후 5시 탐방이 끝나자, 한참 먹을 갈던 허공이 결국 빗방울을 쏟아냈다. 지상에도 하나 둘

수묵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