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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변질된 법관대표회의

바람아님 2018. 4. 12. 10:57

(조선일보 2018.04.12 조백건 사회부 법조팀장)


조백건 사회부 법조팀장조백건 사회부 법조팀장


각급 법원의 직급별 판사 모임인 법관대표회의는 10일 "한 지역에 장기 근무하는 권역별 법관제도를

조속히 시행해야 한다"고 대법원장에게 건의했다. 지금은 판사들이 2~3년마다 법원을 옮겨 다닌다.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사건을 제대로 재판하려면 한 곳에서 오래 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판사가 특정 지역에서만 근무하는 제도는 과거에도 있었다.

그런데 2014년 광주지법이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에게 일당 5억원의 노역장 유치를 선고한 이른바 '황제 노역' 사건으로

향판(鄕判·지역 법관)과 지역 기업 간 유착 논란이 생기면서 폐지됐다. 법관대표회의는 사실상 이 '향판제' 부활을 요구한

셈이다. 물론 좋은 뜻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엔 서울에 오랜 기간 머물고 싶다는 뜻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법관대표회의가 정기적으로 열리게 된 것은 작년 6월부터다. 작년 초 법원행정처에서 불거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계기가

됐다. 98명의 판사는 이 회의를 통해 '재판 독립'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들은 "행정처가 인사권 등을 남용하면 일선 판사들이

윗선의 눈치를 보게 되고 결국 재판 독립이 훼손된다"며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행정처를 강하게 비판했다.


법관대표회의가 지난해 사실무근으로 이미 결론이 난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를 강하게 요구한 것도 재판 독립이

명분이었다. 그 명분 아래 이뤄진 재조사 과정에서 판사 뒷조사 문건이 들어 있다는 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는 당사자 동의

없이 강제 개봉됐다. 불법 논란이 일었지만 법관대표회의 핵심 멤버들은 "재판 독립을 위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밀어붙였다.

블랙리스트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엔 법관대표회의 핵심 멤버들이 재판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확 줄었다. 법관회의는

김 대법원장이 회장을 지낸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들이 주도하고 있다. 행정처 요직도

두 연구회 멤버로 물갈이됐다. 법원 내 특정 서클 출신들이 사법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처와 이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할

법관대표회의를 다 장악했으니 더 이상 재판 독립을 외칠 필요가 없어졌을지 모른다.


그들은 대신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 '근무 평가 개선' 같은 인사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사실상 승진이나 평가를 없애고 한 지역에서 편하게 근무하게 해달라는 요구다.

재판을 받는 일반 국민과는 상관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법관회의는 '좋은 재판'을 위해 꼭 필요하다며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인사 문제를 꺼내 들었다.

법관회의가 이젠 '판사 노조'로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