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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 명작 기행] (10)엄마와 아이가 뛰노는 뤽상부르 정원…왜 남자는 없을까

바람아님 2013. 11. 13. 09:03
알버트 에델펠트의 '뤽상부르 정원에서'

쿠데타로 등극한 나폴레옹…궁전을 파리 시민 쉼터로 바꿔
고전주의에 사실·인상주의 결합…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서 대상
집안일과 아이 돌보는 미덕 강조…19세기말 여성의 현주소 드러나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이면 늘 뤽상부르 정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파리의 대학로인 생 미셸 대로에 면한 이 럭셔리한 녹색

공간은 장시간의 수업으로 쌓인 긴장감을 떨쳐내는 데 그만이었다. 바게트 샌드위치와 음료를 사들고 나무 아래 안락의자에

앉아 식사하면서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볼 때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정원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젊은이였다. 파리 시내 중심가에 있는 데다 주변에 팡테옹,오데옹극장,생 쉴피스 성당 등의 명소

와 운치 있는 카페,책방들이 즐비해 약속 장소로 이만한 곳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따금 한껏 멋을 낸 노신사나 노부인도 보이는데 저마다 따사로운 햇빛 아래 자리를 잡은 채 독서와 사색에 몰입하는 모습이

다. 아마도 그들은 이 젊음의 공간에서 한창 때의 자신의 초상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뤽상부르 정원은 앙리4세의 부인으로 프랑스 왕가에 시집 온 마리 드 메디치가 1612년 세운 곳이다. 한때 섭정으로 정치적

1인자에 올랐던 그녀는 피렌체의 건축가를 불러 메디치가의 피티궁전을 본떠 자신이 거처할 궁전을 짓게 했다. 실내는 각종

회화와 조각으로 장식했다. 1622년에는 국제적인 명성의 루벤스를 초빙해 그녀 일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묘사한 대형 그림들을

제작하게 했다.

정원 설계는 원래 왕실 정원건축가인 자크 부와소가 맡았는데 1635년 앙드레 르노트르가 다시 손을 대 좀 더 기하학적인 냄새

를 풍기는 프랑스식 정원으로 변형됐다.

마리 드 메디치가 사망한 후 이 운치 있는 정원은 퇴락의 길을 걷는다. 루이18세는 궁전건물 개수비용을 마련한답시고 서쪽

정원의 3분의 1을 팔아치웠고,프랑스 대혁명 때는 정치범들이 단두대에 오르기 전 이곳의 밀실에서 최후의 밤을 보냈다.

19세기 초 장 프랑수아 샬그렝에 의해 복원된 이후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하면서 궁전은 상원으로 용도 변경됐다.

정원은 나폴레옹의 명에 의해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로 개조돼 일반에 개방되었는데 이때 곳곳에 정자와 놀이기구,인형극

무대 등이 설치됐다. 정치지배자의 공간에서 대중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쿠데타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파리 시민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뤽상부르 정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의도야 어쨌든 이때부터 뤽상부르 정원은 파리 시민의 것이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핀란드 출신의 화가 알버트 에델펠트의 '뤽상부르 정원에서'(1887)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뤽상부르 정원의 일상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에델펠트는 핀란드대 졸업 후 벨기에의 안트워프에서 잠시 공부하다 1874년 파리로 옮겨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고전주의자인 장 레옹 제롬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파리 화단은 인상주의자들의 등장으로 발칵 뒤집혔는데 기질적으로 고전주의에 공감했던 에델펠트였지만 이 반항아들의

신선한 바람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고전주의에 토대를 둔 사실적 묘사와 인상주의를 결합한 독특한 화풍으로 파리의 일상 풍경을 그려 파리화단으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 1889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해 대상을 받았다. 에밀 졸라,알퐁스 도데,퓌비 드 샤반느 같은

파리의 명사들은 이 재능 많은 북구의 이방인을 앞다퉈 만찬에 초대했다.

'뤽상부르 정원에서'는 살롱에서 인정받은 그의 재능이 한창 무르익은 때 그려진 작품이다. 화면을 보면 전면 한가운데에

훌라후프를 든 계집아이가 머리를 땋아주는 유모에 자신을 맡기고 있고 그 왼쪽에는 분홍 머리 장식을 한 다소 지체가 높아

보이는 젊은 여인이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혀 놓은 채 돌보고 있다. 옆에는 늙은 하녀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시중을 들고 있다.

시선을 화면 오른쪽으로 돌리면 두 아이가 화분과 꽃삽을 만지며 놀이에 몰입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 뒤로 르네상스 양식의

뤽상부르 궁전이 보이고 건물 앞쪽에는 아이를 돌보는 여인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표정은 한결같

이 밝다. 정원에서 전개되는 평온한 일상을 이처럼 정겹게 포착한 화가는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화면에 온기를 불어넣은 데는 인상주의자들의 영향도 컸다. 화면 구석구석을 어루만지는 햇빛의 밝고 따사로운 손길은

인상주의자들의 묘사방식과 통한다.

사물의 고유한 색채를 무시한 것도 그렇다. 한낮의 햇빛을 받은 뤽상부르 궁전(현재의

상원),주변의 나무,땅바닥은 물론 사람들조차 본래의 색을 희생하고 밝은 색조의 노란색

으로 처리됐다. 그러나 모든 대상은 꼼꼼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돼 작가가 고전적 전통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파리 화단에서 갈채를 받았던 것은 바로

새 시대의 새로운 바람(즉 인상주의)을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결합한 데 있다.

이 그림 속에는 성인 남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뤽상부르 정원은 사회활동을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집안일과 아이를 돌보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야 했던 여성들의 순종의 공간으로 설정

돼 있다. 19세기 말 근대 여명기의 아직은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현실을 담는 회화의 원리는 변했지만 현실의 삶은 아직도 여성

들에게 든든한 빗장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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