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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5월의 우체통

바람아님 2019. 5. 28. 06:46


중앙일보 2019.05.27. 00:09


정겹던 우체통엔 고지서만 가득
세금노동일이 5월 말로 연장돼
공약과 파업, 세금 살포 악순환
최소비용 사회합의가 좋은 정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풍경이 있다. 골짜기를 굽어 도는 강줄기, 바람 부는 날 흔들리는 꽃, 기슭에 모여 앉은 산촌. 흔히 보는 것 중에는 빨간 우체통이 그렇다. 정겨운 소식이 날아드는 작은 통. 예전에는 먼 나라로 이민 간 친구의 분투기나 시골 학교 선생이던 누이의 눈물겨운 편지가 들어 있었다. 밤새워 쓴 편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건 두근거리는 청년기를 보내본 사람이면 안다. 대학 시절 내 친구는 연인에게 쓴 편지를 새벽에 부쳤다가 며칠 뒤 그 집 우체통을 뒤져 소인 찍힌 이별사를 간신히 저지하기도 했다.
        

애틋한 사연을 전하던 우체통은 이제 아파트 로비 벽에 벌집처럼 붙어 있다. 거기에 날아드는 소식 중 정겨운 것은 없다. 가슴을 쓸어내릴 것뿐이다. 과태료, 관리비, 건강보험료, 국세청 고지서.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청구서를 한껏 삼킨 우체통은 채무이행을 명령하는 국가의 스피커가 됐다. 준엄하다. 우체통발(發) 국가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자에게 최후통첩을 발하는 곳도 우체통이다. 박근혜 정권 초기, 국세청 직인이 찍힌 통지서에는 이런 구절이 발견되었다. “귀하의 은행 계좌를 추적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나, 마약상? 혹은 불법자금 세탁업자? 그런 음험한 느낌에 섬뜩했다. ‘특이 사항 없음’으로 판명되기는 했다.


5월의 우체통은 섬뜩하다. 종합소득세 납부일을 알리는 통지문이 벌써 도착해서 그곳에 있다. 정부의 씀씀이가 커지면 세금이 오른다. 현 정권에서 정부 예산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불과 2년만에 400조원(2017년)에서 470조원(올해)으로 커졌고, 내년에는 500조원을 돌파할 예정이다. 경제 강국에 걸맞는 규모다. 세금을 올려야 한다. 가장 쉬운 것이 법인세와 소득세다. 6년 동안 조금씩 오른 법인세율은 22%에서 25%로 원상복귀했고, 부자 증세로 옮겨간 현 정권에서 소득세율이 상향조정됐다. 예컨대, 연봉 9000만원 소득자는 35%, 1억5000만원 이상은 38%다. 일자로 따지면, 정월부터 5월 중순까지 번 돈을 몽땅 국고에 반납해야 한다. 여기에 4대 보험, 재산세, 종부세, 기타 소소한 고지서 액수를 합하면 42~45%에 근접한다. 세금노동일이 대충 5월 하순까지 연장된다. 결코 작은 수치가 아니다. 고세금 국가다.


한국이 고세금 국가? 이 질문만큼 계층간 이해충돌을 빚는 것도 드물다. 하층은 면세점 확대와 부자 증세를 강력히 원하고, 중상위 부유층은 감세와 절세를 노린다. ‘건강, 노동, 복지’와 하층민 소득 증대에 매진하는 현 정부는 말할 것도 없이 ‘증세’다. 우파는 돈을 벌고 좌파는 돈을 쓴다. 현 정권이 내세운 증세 논리는 두 가지다. GDP 대비 조세부담율이 한국은 27%로서 OECD 평균 34%에 못 미친다는 것, 소득세와 법인세를 대폭 올려야 복지 확대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법인세를 낮춰줬더니 투자는 외면한 채 금고에 쌓아뒀다’거나, ‘소득 이전이 커야 평등사회가 가능하다’는 말이 세를 얻기 시작했다. 맞는 말이다.


백번 인정해도 세금은 여전히 버겁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게 훨씬 많다는 손실감을 떨칠 수 없다. 우체통이 한없이 미워지는 순간이다. 왜 그런가? 준조세 형태의 잡다한 항목을 봉급자가 지불하기 때문이다. 교육, 양육, 부모 부양, 주택처럼 뭉텅이로 돈이 들어가는 소비 영역이 한국인의 세후 소득을 갉아 먹는다. 단일세금인 사회보장세를 소득에 따라 30~60% 납부하고 주거, 교육, 노후, 4대 보장을 모두 수혜하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임금생활자들은 흑자 살림이다. 사실, 이런 나라들의 복지재정은 주로 기업이 내는 사회보험분담금과 고용주세(稅)로부터 나오기는 하지만, ‘고부담에 저복지?’ 매우 밑졌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널리 퍼진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대통령 공약예산, 즉 통치예산이다.


공약은 정권의 얼굴이다. 폐기하면 공약(空約) 남발, 실없는 정권으로 찍히고, 지키자니 천문학적 예산과 분란이 뒤따른다. 노무현 정권과 MB 정권 공약사업비에 195조원이 들었고, 박근혜 정권도 100조원 가량을 썼다. 현 정권의 행보는 우렁차다. 26조원이 소요된 4대강 보(洑)를 다시 돈을 들여 허물기로 했다. 최저임금 지원에 벌써 60조원을 썼고, 노후보장, 건강보험 혜택을 대폭 늘렸다. 60조원에 달하는 예타 면제사업을 지정해 돈을 풀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지자체가 요청한 돈만 100조원에 달한다. 파업이 일어나면 돈으로 해결하기 일쑤다. 버스 파업에 1조원을 풀었고 게다가 버스비 인상을 암시하고 있다. 공유택시에 저항하는 택시파업도 세금 투여로 풀 것이다. 합하면 하층 면세자 750만명에게 년 20만원씩 걷은 세수와 맞먹는다. ‘보편 과세’를 궁리 중이지만 돈은 이렇게 센다.


최소 비용으로 사회적 합의를 일구는 것이 좋은 정치다. 항의하면 세금으로 틀어막는 정치, 60조원을 투하해 저소득층 일자리를 외려 망가뜨리는 정치에 꼬박꼬박 세금 내고 흔쾌하다 할 사람이 있을까. 5월의 우체통은 밉다. 두렵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