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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혁명세대의 독창

바람아님 2019. 6. 11. 07:49


중앙일보 2019.06.10. 00:05


민중이 참지 못하는 개혁은 실패
초기 합창이 중창에서 독창으로
경제가 정의를 완성, 이게 현실정치
고주성과 소주성은 일란성 쌍생아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기대가 컸다. 보무당당하게 청와대로 입성하던 늠름한 모습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희망나무에 오방낭을 걸던 박근혜 취임 축하연과는 사뭇 달랐으니까. 촛불로 타오른 시민민주주의를 활짝 개화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치 1894년 고종을 유폐하고 경복궁으로 돌진한 갑오 개혁세력을 연상케 했다. 육조대신 회의를 폐하고 군국기무처를 신설해 660개 근대법안을 쏟아낸 갑오경장은 웅장한 횃불이었다. 그런데 민중은 그 급진적 전환을 참아내지 못했다.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그 상투 자락에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김홍집은 처형됐고, 어윤중은 맞아 죽었다. 근대 국가를 향한 혁신은 뼈아프게도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갑오경장을 추진했던 출중한 인물들, 정동파, 갑오파, 갑신파 모두 세상 물정을 잘 알던 당대 지식인들이었다. 개혁 속도와 방향! 예나 지금이나 대소인민, 시민들이 감내하지 못하는 개혁은 저항에 부딪힐 위험이 크다. 어떤 정권이든 항상 정당성과 명분은 충만했다. 집권 3년 차쯤 되면 ‘정의 완성도’를 잴 것이 아니라, ‘시민 만족도’를 측정해야 한다. 만족 혹은 불만, 인내 혹은 반발인가를. 이 시점에서 묻고 싶다. 혁명세대, 그대들은 시민들이 흡족해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반발 직전으로 진단하는가? 만약 후자라면, 청년 시절 그랬듯이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속이 후련한 역사적 결단이 왜 없었겠는가. 국정농단·사법농단 세력을 발본해 감옥에 보낸 것, 은폐와 왜곡에 절은 국가시스템을 바로 잡은 것, 세월호 유족을 해원하고, 과잉진압 경찰에 철퇴를 내리고, 청와대와 내통하던 감찰기관 수장들을 줄줄이 문초한 것. 특혜와 비리에 연루됐다고 지목된 재벌 총수들에 엄벌을 내렸고, 그것도 모자라 전방위 수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군(軍)은 갑(甲)질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고위 관료는 사욕을 채우거나 인사비리 집단이 됐고, 언론과 방송 지휘부는 교체됐다. 박근혜 정부에서 외곽에 유배됐던 인사들, 노조의 검열에 통과된 인사들이 공영 방송을 장악했다. 모두 ‘나라다운 나라’ ‘정의로운 나라’를 향한 행진곡이었다.


그런데 왜 점차 지루해지는가? 자꾸 의구심이 드는가? 정권 초기 한목소리로 부른 합창이 왜 잦아드는가? 애창곡이라도 몇 년을 들으면 주파수를 바꾸고 싶은 게 세간의 심리다. 민의(民意)를 어루만지지 못하면 합창은 중창(重唱)으로, 중창은 독창(獨唱)이 되어 주변을 맴돌 뿐이다. 독재 군부에 저항했던 80년대 혁명세대, 이제 그대들의 행진곡이 향기를 잃고 있다는 신호다. 그대들의 말과 행동에 아집이 서렸다는 뜻이다.


혁명세력이든 수구세력이든 성과를 내지 못하면 인내심은 고갈된다. 예나 지금이나, 혁명과 수구의 성패를 가름하는 뇌관은 경제다. 시민들이 전두환 폭정을 감내했던 이유는 경제 호황이었다. 정의가 경제에 맥을 못 춘다는 사실은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널리 판명된 정치적 명제다. 소득주도성장? 모든 경제지표가 급격하게 꺾인 이 마당에 시민들의 인내심이 이미 고갈됐음을 왜 눈치채지 못하는가? 인내심과 일관성은 혁명세대 그대들의 것, 시민 정서는 역사적 정의보다 배고픔과 고달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대다수 경제학자, 사회학자가 ‘오류!’로 판정한 소주성에 그토록 목매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장은 소득에서 나온다? 그러면 소득은 어디서 나오는가? 말할 것도 없이 ‘고용’이다. 경제정책을 고용으로 급선회하지 않으면 그대들의 업적은 소멸될 것임을 혁명세대, 그대들만 모른다. 고집불통이거나, 실력이 없다는 증거다. 소주성은 독창이다.


유럽 좌파가 백년 간 바꾸지 않은 목표가 바로 ‘완전고용’이다. ‘고용은 소득 창출의 원천’이란 명제가 사민주의의 금과옥조다. ‘자본주의에서 완전고용은 불가능하다’고 1936년 케인즈가 썼다. 어떻게 할까? 유럽 좌파가 창안한 정책은 두 가지였다. ‘연대임금정책’과 ‘적극적 노동시장정책(ALMP)’. 두 정책은 연계된 그물망이다. 고임부문의 임금 양보와 저임부분의 임금 인상. 그러면 소득 불평등은 줄고(연대), 고임부문의 고용 창출은 커진다. 대신, 임금 압박에 눌려 도산하거나 파산하는 저임부문의 실직자는 국가가 수용해 재취업할 때까지 생계를 보장하는 게 골자다(ALMP). 저임부문도 피고용자에게 직접 현금을 지원하는 EITC(근로장려세제)를 시행해 고용주의 부담을 덜어 줬다. 대신 고임부문에 제공된 임금 양보 혜택은 복지세금으로 환원됐다. 복지 황금시대가 도래했고, 노동자 연대가 실현됐다. 격렬했던 파업이 잦아들자 산업경쟁력이 상승했다.


경제를 누가 지휘하는가? 노동시장 전문가가 있는가? 장하성과 김현철은 자본시장론자였고, 홍장표는 소득분배론자다. 성장, 복지, 고용 삼각형에서 성장과 고용이 망가지고 있다. 세금으로 지탱하는 복지, 그걸 누군들 못할까. 독창을 그만두고 유럽 좌파처럼 ‘고용주도성장(고주성)’으로 전환해 달라. 소주성과 고주성은 일란성 쌍생아, 성격이 다를 뿐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