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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그 작품 그 도시] 절망의 심연 속, 추억의 빛이 날 붙잡았다

바람아님 2016. 12. 31. 23:17
조선일보 : 2015.06.20 03:00

에세이 '보이는 어둠'―서울

어둠이 내린 서울의 한강, 빌딩들이 하나하나 불을 밝히고 있다. 윌리엄 스타이런의 에세이 ‘보이는 어둠’은 스타이런 자신이 겪은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1985년 10월 죽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자살을 실행하려던 순간 우연히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를 듣게 되고 행복했던 추억 하나를 떠올린다. 햇살 가득한 거실에서 알토 랩소디를 흥얼거리던 엄마의 기억이 떠오르자 스타이런은 마음을 되돌린다. 백영옥은 “이미 살아본 삶, 그 순간을 ‘다시’ 살아내는 능력이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라고 쓴다. /픽사베이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을 여러 번 읽었다. 영화 '소피의 선택'의 원작자로도 잘 알려진 스타이런의 이 책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시골 동네 전화국이 홍수에 잠겨 드는 것처럼" 불시에 가라앉기 시작한 의식, 자신을 덮친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다. 수십 년간 음료처럼 마시던 위스키를 끊은 후, 그러니까 1985년 10월 파리에서 윌리엄 스타이런은 그동안 남몰래 분투했던 우울증이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으리란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 살아 있는 육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매 순간 겪는 고통을 기록하는 일뿐이라는 걸 깨닫자 그는 죽음을 결심한다. 그러나 자살을 실행하려는 순간 그는 우연히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를 듣게 된다.

현재를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은 어디에 기대야 할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온통 죽음밖에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버텨내야 하는 걸까. 내게 그것에 대해 알려준 사람은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쓴 니나 상코비치였다.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하지만 가족이나 연인을 불시에 잃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 즉 추억이다. 이미 살아본 삶, 그 순간을 '다시' 살아내는 능력이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다.

브람스의 음악은 죽기 직전의 그를 살린다. 스타이런 역시 브람스의 음악을 듣는 순간 행복했던 추억 하나를 떠올렸다. 오후 햇살 가득한 거실, 알토 랩소디를 흥얼거리던 엄마와 나눈 추억이 벼랑 끝에 서 있던 그의 손을 움켜잡은 것이다. 그는 자살 대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우울증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한다.

"모든 형태의 상실감은 우울증의 시금석이다. 이 병의 진행 과정과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상실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시달리고 있는 장애의 근원이 유아 시절에 경험한 상실감이라는 점을 점차 수긍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우울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한 친구를 떠올렸다. 그는 술을 안 마시면 잠을 자지 못했다. 우울증은 그에게 참기 힘든 불면과 알코올중독 증세를 동반했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가장 무서운 것은 술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 순간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날마다 술이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졌던 내 몸이 갑자기 술을 거부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더더욱 술이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술이 내게서 등을 돌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 많은 술꾼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런 거부 현상을 경험한다고 했다."

3년 만에 장편소설을 탈고한 후,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산후 우울증처럼 찾아오는 무력감, 잠을 자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설상가상, 메르스 바이러스가 창궐한 도심으로 나가는 일은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메르스 때문에 소설 출간은 가을로 연기되었다. 분량이 꽤 긴 장편을 연재하느라 나는 새로운 병명 하나를 더 얻게 되었는데, 그건 좌골신경통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많은 정형외과에 들르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뉴스에서 메르스 3차 감염자가 나왔다고 한 날, 사망자 숫자를 헤아려 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이 든 중증 환자였다. 하지만 16일 에는 40대 환자가 사망했다는 속보를 봤다. 나는 '보이는 어둠'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다가, 거의 마지막 페이지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순간만큼은 스타이런의 그 어떤 말보다 번역자 임옥희씨의 문장이 더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꼬마가 뜬금없이 엄마의 꿈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잘 죽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죽음의 공포에 늘상 사로잡혀 사는 꼬마는 엄마의 무분별하고 무심한 대답에 상처받고 울었다. 그래서 어린 우울과 늙은 우울이 등을 기대고 앉아서 위안을 나눴다. 잘 죽는다는 말은 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을 긍정하고 욕망하는 것이라고 나는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울이 간혹 우리를 찾아와 방문을 두드리더라도 이처럼 등을 맞대고 온기를 느끼고 있는 한 생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처소가 되지 않을까?"

'어린 우울'과 '늙은 우울'이 등을 기대고 앉아서 위안을 나눴다, 라는 문장을 읽다가 그만 울고 말았다. 엄마가 먼저 죽을까 봐 우울한 꼬마와 아이가 아플까 봐 우울한 엄마, 죽지 못해 다니는 회사 때문에 우울한 아빠, 누구도 읽어주지 않는 소설을 쓰느라 새로운 병을 얻은 소설가의 우울이 떠올라 서글펐다. 메르스 바이러스처럼 늙은 우울과 어린 우울, 젊은 우울이 내가 사는 이 도시, 서울에 넘쳐 흐르는 것 같다.

'보이는 어둠'을 읽고,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읽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새 책을 읽는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았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그날, 나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책에서 문장 하나를 '다시' 발견하고 밑줄을 그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뉴욕의 모든 베개 밑에서 저수지로 이어지는 특수 배수구를 발명했다. 사람들이 울다가 지쳐 잠이 들 때마다 눈물이 전부 같은 곳으로 흘러가게 되면, 아침마다 일기예보관이 눈물 저수지의 수위가 올라갔는지 내려갔는지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보이는 어둠―윌리엄 스타이런의 에세이

만약 소설 속 아이의 상상력처럼 '눈물의 저수지'라는 게 있다면, 내가 사는 도시의 눈물은 자꾸, 자꾸만 저수지를 넘쳐 흘러 일기예보관은 정확한 수치를 기록할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나 말고는 한 명도 없었다. 오후 3시의 한적한 6호선 안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이 열 명이나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표정이 보이지 않는 그 얼굴 너머에서 어둠이, 짙은 어둠이 보였다.


●보이는 어둠―윌리엄 스타이런의 에세이


백영옥·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