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2.03 윤희숙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나랏돈 들어가는 사업은 따지고 정부가 부담 지는 것이 法 정신
24조원대 사업 예타조사 면제는 '나눠먹기식 재정 투입' 양성화
4대강 사업 때는 비판해 놓고 지금은 같은 길 밟겠다고 하나
윤희숙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지난 1월 29일, 총 24조원 규모 23개 대형 국책 사업이 예비 타당성 조사(예타) 면제 대상으로 발표됐다.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언론과 시민단체는 "또 토건을 통한 경기 부양이냐"며
비판하고 있다. 사실 한국의 사회간접자본(SOC)은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대형 사업들을 초고속으로 검토해 밀어 넣는 것을 쉽게 합리화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국가 균형 발전이란 상위 목표를 위해 기준을 약간 완화했을 뿐이라 항변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균형 발전이냐 경기 부양이냐보다 본질적인 문제점은 이번 조치가 만성적 구태(舊態)들을 화려하게
양성화·공식화함으로써 어렵게 정착 중이던 재정 관련 법과 규율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것이다.
뿌리 깊은 구태란 바로 '깜깜이 지출'과 '짬짜미 사업'이다.
첫째, 대부분이 놓치고 있지만 1999년 도입된 예타의 역할은 투자 결정이 아니라 '깜깜이 방지'다.
흔히 정부의 정책 의지가 강하거나 정책적 중요성이 높아도 예타 결과가 나빠서 좌절된다고 오해하는데,
기실 법령 어디에도 예타 결과가 구속성을 가진다는 내용은 없다.
즉, 국가재정법은 대형 국책사업에 대한 조사를 의무화해 결과를 국회에 보고하고 공개할 것을 강제하고 있을 뿐,
예타 결과와 판단이 다르다면 정부가 그 근거를 밝히고 추진하면 된다.
법의 정신은 결국 나랏돈이 대거 투입되는 사업은 필히 꼼꼼히 따져봐야 하며,
각종 질문에 답하는 부담을 정부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타 면제란 양질(良質)의 정보와 분석 결과가 생산될 기회를 봉쇄함으로써 자료에 근거한 질문조차 불가능한
깜깜이 지출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현재 정부는 국무회의 통과 사업에 한해 예외적으로 예타 면제를 허용한
법 조항에 기대서 절차적 흠결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된 핑계일 뿐, 1년치 SOC 예산 전체보다도
큰 규모의 무더기 면제는 법 정신을 무화(無化)시킨 것과 같다.
둘째, 이번 발표는 지역 민원 사업을 균형 발전과 슬쩍 등치시킴으로써 어마어마한 규모의 나눠 먹기식 재정 투입을
양성화했다. 균형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국가 전체의 시각에서 병목 요인이 무엇이고 낙후 지역이 어디인지
심도 있게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도 17개 시·도의 신청을 받아 안배한 것은 '총선용 짬짜미'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균형 발전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점도(아마도 도로·철도 접근성 중심으로 해석하는 듯하나),
24조원에 달하는 지출로 무엇을 이루려는지도 제대로 제시된 바 없다.
무엇보다 그간의 재정 관리 역사는 사전에 설정된 합리적 기준에 의거해 재원을 배분함으로써 지역민원과 정책 결정을
분리해서 옥석을 가리는 노력의 체계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전 국민이 부담한 국고를 지역 민원 사업에 끌어오면
지역이 부담하는 가격이 대폭 하락하게 되니, 너도나도 절실하다며 지역 사업의 편익을 과장할 유인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지역 숙원을 들어준 것이 뭐가 문제냐는 식의 현재 정부 반응은 마치 그간의 재정 관리 노력과 제도적 장치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러한 선례가 만들어진 이상 앞으로 대규모 국책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유력 정치인이 "지역 주민의 숙원"이라며 음으로 양으로 실력을 행사하면 될 뿐 굳이 정책적 합리성을 보일 이유가 없다.
이번 결정이 재정 규율 측면에 가져올 장기적 부작용은 감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더구나 깜깜이 지출을 위해 시행령까지 고쳐가며 예타를 면제했던 4대강 사업은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아직도
규명 중일 정도로 정책 역량을 소모한 바 있다.
이를 강도 높게 비판해온 정부가 동일한 궤적을 밟겠다고 당당히 발표한 것에 대한 실망감 역시 크다.
지방재정제도를 개선해 지방의 책임과 권한을 함께 증대하고 변화하는 요구에 맞춰 예타 제도를 보수하는 등
구조적 보완이 모색되어야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일단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이번 예타 면제 사업들을 철저히 검토해 손실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유사한 우회책이
향후에도 도모될 수 있는 유인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4대강 사업의 원죄를 지고 있으면서도 이번 발표를 정치적 호재로 삼아 비난하고 있는 야당이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임할지가 관건이다.
겉으로는 예타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뒤로는 각자의 지역구 사업이 예타 면제되거나
통과되도록 압력을 행사해온 국회의원들에게 의지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지만 달리 방도가 없으니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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