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덴지(天智) 일왕은 신라와 당이 연합해 일본으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는 서둘러 방비에 나섰다. 일본 땅 가운데 외부의 적이 가장 먼저 침입할 수 있는 규슈(九州)에 도독부 '다자이후'(太宰府)를 설치했다. 현재의 후쿠오카(福岡) 남동쪽 소도시 다자이후시(市) 지역이다. 이후 신라, 당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자 다자이후는 대외 교류의 창구가 되었다. 한반도 및 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이 들어와 새로운 문화를 쌓아올렸다. 그때 매화도 중국으로부터 수입됐다. 매화는 고관대작이나 귀족들의 뜰에 심어졌다.
서기 730년 나라(奈良)시대의 가인(歌人)들이 이 곳의 한 저택에 모여 연회를 열었다. 다자이후 장관 오오토모노 다비토(大伴旅人)의 집이었다. 때는 음력 정월, 추위는 물러나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싹트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를 입증이나 하는 듯 정원에는 매화 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시정(詩情)에 유혹당한 사람들은 각각 매화를 소재로 와카(花歌)를 읊었다. 호스트인 오오토모노 역시 '초춘영월 기숙풍화'(初春令月 氣淑風和· 초봄 길한 달, 공기는 맑아지고 바람은 부드럽네)라고 노래했다. 그들의 작품은 일본 최고(最古)의 시가집 '만요슈'(万葉集)에 남게된다.
지난 4월 1일 일본의 새 연호가 발표됐다. '레이와'(令和)다. 만요슈 제 5권에 실린 '매화의 노래' 서문에 기록된 오오토모노의 와카에서 발췌했다. '영월'(令月)에서 영(令)을, '풍화'(風和)에서 화(和)를 각각 따왔다. 1289년 전 '매화의 노래'가 연호로 재탄생한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새 연호에 대해 "아름다운 마음을 모아 문화를 태어나게 하고 키우자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내일의 희망과 함께 각각 꽃을 크게 피울 수 있는 일본이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새 연호는 오는 4월 30일 아키히토(明仁·86) 일왕이 퇴위하고 나루히토(德仁·59) 왕세자가 새 일왕에 즉위하는 5월 오전 0시부터 적용된다. 유신(維新)의 메이지(明治), 낭만(浪漫)의 다이쇼(大正), 격동(激動)의 쇼와(昭和)에 이어 명암(明暗)의 헤이세이(平成) 시대도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레이와 시대가 오는 것이다.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질 헤이세이는 '나라 안팎에도, 하늘과 땅에도 평화가 달성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30년에 걸친 헤이세이가 '재앙의 시대'였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홋카이도(北海道) 강진, 한신(阪神) 대지진,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 사고 등 초대형 재난이 잇따랐다. 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이 시기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일본 역사상 드물게 평화를 누렸다는 것이다. 이 30년은 메이지유신 이후 유일하게 전쟁이 없던 시대였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85세 생일을 맞아 "헤이세이가 전쟁 없는 시대로 끝나려고 하는 것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새 연호 레이와는 평화·조화·질서를 의미한다. '영'(令)은 명령이나 지시를 말하는데, 아름답고 좋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존경을 표할때 자주 쓴다. 그의 부인을 영부인(令夫人), 그 아들과 딸을 영식(令息), 영애(令愛)로 부르는 것이 대표적 예다. '화'(和)는 일본을 상징하는 한자로 조화·화합·평화를 뜻한다. 따라서 레이와는 직역하면 '평화를 명한다'는 뜻이고, 의역하면 '아름답게 화합하다'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연호가 바뀐다 하여 갑자기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 시대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미래를 향한다는 시대적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레이와시대 한일관계는 어떻게 펼쳐질까. 최근들어 한일관계는 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으로 최악의 상황이다. 따라서 한일관계 복원의 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다행히 새 연호에 담긴 의미를 보면 한일관계의 돌파구를 보는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든다. 아름다운 새 연호에 부끄럽지 않게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사죄하면서 양국이 평화롭게 화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혹독한 추위 뒤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을 알리며 멋지게 피어나는 매화처럼 말이다. 추운 겨울이라도 꽃을 피워내고 그 향기를 멀리 풍겨내는 관계가 되기를 양국 국민들은 기원한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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