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3.31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이순신 이후 조선, 월드컵 이후 대한민국… 전보다 나아졌는가
우리에겐 '이야기'는 있었지만 '역사'는 없었다, 정치 때문에
큰 위기 때 살아남으면 더 강해져… 이 힘을 미래 여는 데 써라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가 열리는 동안 대한민국은 하나였다.
해방 직후부터 내내 갈구했던 통합과 화합이 축구공 하나로 모두 실현되었다.
누구나 친구였고 동지였다. 시민 의식도 높아졌다.
집단 응원 후에도 쓰레기가 없었고, 모두 서로를 배려하고 친절하였다.
집단적 긍정과 자존감을 공유하는 대사건이었다. 당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어 하고,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에 충분히 성공하였다.
이렇게만 하면, 한마음으로 뭉쳐 한 단계 더 성숙한 나라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부터 정치권에서 자민련 의원들의 한나라당 입당 사건이 벌어지며 3당 구도가 재편되는
혼란스러운 정치가 월드컵 기간 내내 계속되었고, 월드컵 기간 전후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이 부패 사건으로
차례로 구속되면서 레임덕이 정점에 이르렀다. 월드컵이라는 축제는 화려하고 착실하였으나 그것을 지탱하는
하드웨어인 정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비생산적이었다. '이야기(story)'를 '역사(history)'로 진화시키지 못했다.
우린, 이야기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광주에는 충장로라는 도로가 있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도로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25세에 형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여 선조에게 초승 장군이라는 군호까지 받고
수차례 왜군을 물리쳤으나 '정치'의 올가미에 걸려 고문당하다 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임진왜란은 조정이 내부 정치에만 빠져 비효율을 쌓다 당했으나 민간 의병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 전쟁이다.
하드웨어인 조정의 지도력은 수준이 낮았다. 선조는 기능적 정치로만 놓고 보면 조선 왕조에서 가장 단수가 높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왕이라기보다는 자기 권력 주변부와만 뭉치는 코드 인사와 진영 정치로 일관하였다.
빛나는 의병들을 죽이고, 교활한 측근들을 챙겼다.
대내적인 정치에만 몰두하는 정치 집단에는 대외적인 치욕이나 종속은 아무렇지 않다.
창피하지도 않고 자존심도 상하지 않는다. 내적인 작은 승리로, 외적인 큰 치욕을 대체해버린다. 선조가 그랬다.
의병들의 '이야기'를 '역사'로 진화시키지 못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난리다. 이것은 분명히 위기다.
정부의 초기 대응은 방역보다 정치에 집중하느라 실패한 면이 있다.
병이 발생한 나라에 '운명 공동체'라고 하느라 문을 닫지 못했다.
총리는 상호주의를 거론하며 그 나라가 문을 닫을까 걱정하는 듯이 말했지만, 정작 그 나라가 문을 닫자
상호주의를 어디다 둘지 몰라 머쓱하였다.
하지만 세계는 한국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벌이는 전투를 성공적이라며 칭찬하고 있다.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질병관리본부와 지자체 직원들의 헌신은 아무리 박수를 받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방역 전투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무엇보다 빛나야 할 주인공은 국민이다.
사재기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마스크를 양보하기도 하였다.
봉사대를 조직해 필요한 물품을 소외 계층에게 공급하였다.
서로 격려하고 친절하였으며, 공조직의 지시를 대체로 잘 따랐다.
또 한 번 집단적 긍정과 자존을 경험하며, 승리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문제는 지금 쓰는 '이야기'를 '역사'로 만들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일러스트=김영석
아무리 큰 위기라 해도 죽지 않고 살아남기만 하면, 더 강해지는 것이 이치다.
문제는 더 강해진 힘을 과거에 묻어버릴 것이냐 아니면 미래를 여는 데 쓸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야기'로만 남기느냐 아니면 '역사'화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월드컵 때도 세계는 대한민국의 열기와 응원 문화, 시민 의식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으며,
심지어는 우리를 따라 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의병들 이야기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공적은 세계가 인정하며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고 하여, 월드컵 이후의 대한민국이 월드컵 이전의 대한민국보다 훨씬 나아졌는가.
이순신 이후의 조선이 이순신 이전의 조선보다 더 나아졌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나라가 빛나는 '이야기'를 다 '역사'화하는 데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반복을 통해 겨우겨우 해내는 일이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해내야 할 때다.
지금 세계가 보내는 박수 소리를 하나의 '이야기'로 묻어버리지 않고 '역사'로 만들 도전에 나서야 한다.
지금 받는 박수를 역사로 바꿀 역량은 아직 없다
'이야기'를 '역사'로 제조하는 일은 하드웨어 역할을 하는 정치로만 가능하다.
월드컵 이야기나 의병 이야기가 역사로 진화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정치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가 세계에서 받고 있는 박수 소리를 역사로 바꿀 정치 역량은 준비되어 있는가. 애석하게도 아직 아니다.
분열의 강도는 헌정 사상 최악이고, 모든 정치 영역에서 본질은 사라지고 기능적 공작만 남았다.
의원을 꿔주고, 말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염치와 논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막장이다.
이런 조건에서 '역사'를 기대하는 것은 마늘밭에서 포도주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다른 말 다 필요 없다.
다가오는 21대 총선에만 한시적으로 적용하는 선거 제도를 가지고 나랏일을 볼 정치인을 뽑는단다.
비례 투표용지는 35칸으로 된 48.1㎝의 두루마리란다. 자동 개표도 못 하고 손으로 개표해야 한단다.
블랙코미디도 이런 블랙코미디가 없다. 우리가 만든 정치는 고작 이 정도다.
'역사'를 건축할 수 있을까 없을까? 정치인,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런 정치인들이 사는 토양인 우리 모두는 도대체 누구인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31/2020033105121.html
[최진석의 아웃룩] 신채호 선생의 통곡소리가 아직도 그대로다 (2020.03.04)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04/2020030400009.html |
[최진석의 아웃룩] 대통령은 헌법 수호하는 軍 통수권자이지 민족 지도자 아니다 (2020.02.05)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05/2020020500003.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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