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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순국 104주기②]‘이토 저격자는 애국자…부패한 韓정부 문제’ NYT 1909년 사설

바람아님 2014. 3. 11. 19:32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은 미국의 언론은 물론, 유럽, 대양주에 이르기까지 당시 세계의 언론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호주의 브리스베인 쿠리어는 저격 나흘째인 1909년 10월30일 ‘이토 백작의 암살’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현장에서 속보로 전하는 등 요즘 언론 못지 않은 기동력을 발휘한 뉴욕 타임스는 다음날인 10월27일 하와이 호놀룰루 발로 한인사회의 환영성명을 보도해 주목을 받았다. 사진은 1909년 10월 28일 호주 브리스베인 쿠리어 신문. 2014.03.05. <사진=NY타임스 DB> robin@newsis.com 2014-03-06
'이토 처단' 이튿날 하와이 한인들 "환영" 성명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은 미국의 언론은 물론, 유럽, 대양주에 이르기까지 당시 세계의 언론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호주의 브리스베인 쿠리어는 저격이 일어난 지 나흘째인 1909년 10월30일 '이토 백작 암살' 제목으로 “이토는 일본으로선 유럽에 견줄만한 가장 위대한 정치인의 하나”라면서 그의 생애를 소개하는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브리스베인 쿠리어는 1864년부터 1933년까지 뉴스코프사가 발행한 타블로이드 신문으로 당시 호주는 1900년 1월1일부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으로 독립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 영국의 영향력 아래 이토의 죽음을 조명해 흥미를 준다.

브리스베인 쿠리어는 “이토가 유럽의 12세기보다 더 낙후한 봉건주의 국가인 일본의 발전을 가져왔다”며 장차 한국의 독립을 돕고 일본의 동맹국의 일원으로 발전시킬 인물로 긍정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토 저격 사건은 일본의 한반도 통치를 비롯한 극동에 세계가 주목하도록 만들게 하고 있다”면서 대륙 침략의 전초 기지가 된 한반도의 거센 풍파를 예고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은 미국의 언론은 물론, 유럽, 대양주에 이르기까지 당시 세계의 언론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호주의 브리스베인 쿠리어는 저격 나흘째인 1909년 10월30일 ‘이토 백작의 암살’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현장에서 속보로 전하는 등 요즘 언론 못지 않은 기동력을 발휘한 뉴욕 타임스는 다음날인 10월27일 하와이 호놀룰루 발로 한인사회의 환영성명을 보도해 주목을 받았다. 1909년 6월15일 월 스트리트 저널(WSJ)은 이토에 아부할 수밖에 없는 대한제국 황실의 나약성을 굴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사진은 고종황제. 2014.03.05. <사진=www.en.wikipedia.org> robin@newsis.com 2014-03-06
        
이토 저격이 일어나기 넉 달여 전인 1909년 6월15일 월 스트리트 저널(WSJ)은 이토에 아부하고 눈치를 살피는 대한제국 황실의 나약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전단계인 조선통감부를 이끈 ‘이토 백작 한국 통감 사직(PRINCE ITO RETIRES FROM KOREA)’ 제하의 기사에서 “도쿄의 이토 백작이 공식적으로 통감직을 사임하고 소네 자작이 후임으로 부임했다. (고종)황제는 이토 백작의 노고를 치하하는 교서를 발표했다”고 전했다.

고종의 교서는 “귀하는 한국에서 훌륭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귀하의 조선통감직 사임을 받아들이며 일본과의 미래 관계에 대한 도움과 입장에 의지해 왔음을 말씀드립니다. 우리 국민들은 당신의 입장에 복종할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굴욕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고종은 은밀히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과 이위종, 이상설 등 밀사를 보내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요로 이뤄진 것을 알리려 했다. 다름아닌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 하지만 영·일 동맹을 맺고 있는 영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토로부터 엄청난 후과를 치르게 된다.

7월1일 전문을 통해 헤이그 밀사 건을 알게 된 이토 히로부미는 격분하여 고종을 협박, 퇴위시키고 7월20일 양위식을 강행했다. 그리고 한국을 합병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정미7조약을 맺고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사법권·경찰권의 위임을 하도록 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은 미국의 언론은 물론, 유럽, 대양주에 이르기까지 당시 세계의 언론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호주의 브리스베인 쿠리어는 저격 나흘째인 1909년 10월30일 ‘이토 백작의 암살’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현장에서 속보로 전하는 등 요즘 언론 못지 않은 기동력을 발휘한 뉴욕 타임스는 다음날인 10월27일 하와이 호놀룰루 발로 한인사회의 환영성명을 보도해 주목을 받았다. 사진은 저격 닷새 전 이토의 만주 여행을 유일하게 보도한 1909년 10월21일 데일리 트리뷴의 관련기사. 2014.03.05. <사진=NY타임스 DB> robin@newsis.com 2014-03-06
                    
        
정미7조약은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등 이른바 ‘정미칠적(丁未七賊)’이 서명했다. 민초들의 의병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지식층은 일본의 위세에 기가 질린 채 이 무렵 애국가를 작사한 윤치호 등 소수 인사들만이 서울에서 공개적으로 반대 집회를 개최했다.

이토의 만주 여행에 관한 유일한 기사는 1909년 10월21일 데일리 트리뷴에 남아 있다. 저격당하기 닷새 전 중국 다롄(大連)을 방문했을 때 ‘이토의 만주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송고된 것이다. 트리뷴은 “만주를 방문 중인 이토 백작이 다롄에서 러시아 총영사가 주재하는 환영 만찬을 가졌다. 300명의 일본인과 중국인 하객들이 함께 한 만찬에서 그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힘쓸 것이며 문호 개방과 기회 균등에 힘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토 백작은 중국이 채택한 발전적인 정책에 깊은 공감을 표하고 일본 정부는 중국의 발전을 돕는데 힘을 기울일 것”이라며 “동아시아의 발전과 사업을 위해 일본인과 러시아인은 물론, 중국인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현장에서 긴급송고하는 등 요즘의 언론 못지 않은 기동력을 발휘한 뉴욕 타임스는 연이은 속보를 전한다. 10월27일 하와이 호놀룰루 발로 한인사회의 환영 성명을 보도한 것이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은 미국의 언론은 물론, 유럽, 대양주에 이르기까지 당시 세계의 언론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호주의 브리스베인 쿠리어는 저격 나흘째인 1909년 10월30일 ‘이토 백작의 암살’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현장에서 속보로 전하는 등 요즘 언론 못지 않은 기동력을 발휘한 뉴욕 타임스는 다음날인 10월27일 하와이 호놀룰루 발로 한인사회의 환영성명을 보도해 주목을 받았다. ‘이토 사살 찬사(Praises Ito's Slayer)’와 ‘한인애국회, 이토는 2000만 명을 노예삼아’라는 두 줄 제목의 기사를 송고했다. ‘2014.03.05. <사진=NY타임스 DB> robin@newsis.com 2014-03-06

‘이토 사살 찬사(Praises Ito's Slayer)’라는 큰 제목과 ‘한인애국회, 이토는 2000만 명을 노예 삼아’라는 작은 제목으로 송고된 기사는 10월28일자에 게재됐다.

기사는 “한인애국회가 이토의 저격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면서 이례적으로 성명서 전문을 게재했다. ‘우리 2000만 명의 독립을 위한 때가 왔다. 이토는 죽었다. 그는 우리나라를 일본의 지배 아래 놓고 우리 국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의 탐욕이 불러온 대가이다. 이토의 범죄는 용서할 수가 없다. 그에게 일어난 것은 협잡에 대한 마땅한 대가이자 우리나라의 응징이다. 우리는 이토를 죽인 애국적 한국인이 누구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누구이건 간에 그는 조국을 위한 일을 했으며 그의 이름은 잠자고 있는 2000만 명 앞에 애국을 위해 희생한 예로서 역사 속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한인애국회(The Korean Patriotic League)는 1909년 2월1일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식민 지배를 받게 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호놀룰루에서 결성된 대한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로 추정된다. 하와이 지역 한인사회의 최고통일기관으로서 독립군기지 개척 운동과 군인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미국 정부로부터 한인 자치기관으로 인정받아 경찰권을 행사하는 등 한인사회 보호와 항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타임스는 10월30일엔 ‘한국인 애국자들(Korean Patriots)’이라는 사설을 통해 한국과 필리핀의 상황을 비교해 눈길을 끌었다. 필리핀이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이전 지배자인 스페인의 압제 통치로 돌아가려는 반체제 무리들과 일본의 한국 지배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이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은 미국의 언론은 물론, 유럽, 대양주에 이르기까지 당시 세계의 언론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호주의 브리스베인 쿠리어는 저격 나흘째인 1909년 10월30일 ‘이토 백작의 암살’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현장에서 속보로 전하는 등 요즘 언론 못지 않은 기동력을 발휘한 뉴욕 타임스는 다음날인 10월27일 하와이 호놀룰루 발로 한인사회의 환영성명을 보도해 주목을 받았다. ‘이토 사살 찬사(Praises Ito's Slayer)’와 ‘한인애국회, 이토는 2000만 명을 노예삼아’라는 두 줄 제목의 기사를 송고했다. 사진은 이토가 이용한 남만주 철도 자료사진. 2014.03.05. <사진=www.en.wikipedia.org> robin@newsis.com 2014-03-06
                    

사설은 “한국이 일본의 축출로 이익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한국의 허약한 황제 밑에 있는 지배계급은 독점과 부패 등 모든 종류의 착취를 하고 있다. 필리핀에 견주면 스페인의 악명높은 압제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는 아귀날도와 그의 무리들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타임스는 “장기적으로 이토의 정책이 실현됐을 때 한국인들이 번영과 현대의 문명 사상을 얻을 것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허약한 왕조와 탐욕스러운 과두정치(寡頭政治)에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대한제국 황실을 비롯한 지배층에 대한 불신을 보였다.

그러나 타임스는 일본의 정책과 통치 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점도 잊지 않았다. “일본의 한국 정책은 우리가 필리핀에서 하는 것처럼 한국민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일본의 방법이 우리보다 더 잔혹하고 국민 교육과 자치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고 의문을 제기하긴 힘들다.”

미국은 1900년대 초만 해도 일본이 한국을 평화로운 문명국으로 개화시키겠다는 말을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을사늑약(1905년)을 기점으로 정미7조약(1907년) 등 합병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잔혹한 진압이 자행되고 뉴욕 타임스와 같은 주요 언론들이 이를 다루면서 회의론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은 미국의 언론은 물론, 유럽, 대양주에 이르기까지 당시 세계의 언론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호주의 브리스베인 쿠리어는 저격 나흘째인 1909년 10월30일 ‘이토 백작의 암살’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현장에서 속보로 전하는 등 요즘 언론 못지 않은 기동력을 발휘한 뉴욕 타임스는 다음날인 10월27일 하와이 호놀룰루 발로 한인사회의 환영성명을 보도해 주목을 받았다. ‘이토 사살 찬사(Praises Ito's Slayer)’와 ‘한인애국회, 이토는 2000만 명을 노예삼아’라는 두 줄 제목의 기사를 송고했다. 사진은 1909년 10월30일자 NYT 사설 ‘한국의 애국자들(The Korean Patriots)’. 2014.03.05. <사진=NY타임스 DB> robin@newsis.com 2014-03-06
                    
        
일본의 잔혹성은 호주의 브리스베인 쿠리어가 1909년 10월30일 인용한 차이니스 프레스 자료에서도 잘 드러난다. 차이니스 프레스는 일본이 정미7조약을 맺은 1907년 7월부터 1908년 8월까지 일본 군인과 헌병대가 최소 1만2916명의 한국인들을 살해했다고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보도했다.

다음은 1909년 10월30일 NYT 사설 전문 번역문.

'한국의 애국자들'(The Korean Patriots)

저격자(안중근 의사)와 그의 동료들은 한국 정책을 좌우한 일본의 최고 정치인(이토 히로부미)을 사살한 것이 한국민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 점에서 보스턴 트랜스크립트에 부쉬넬 하트 교수가 한국과 필리핀을 비교한 글을 기고한 것은 흥미롭다.

이 글은 한국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역할과 필리핀에서의 태프트의 공통점을 포착했다. 두 경우 공히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격렬한 저항을 수반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과 필리핀은 똑같은 비교를 할 수 없다. 한국이 일본의 축출로 이익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한국의 허약한 황제 밑에 있는 지배 계급은 독점과 부패 등 모든 종류의 착취를 하고 있다.

필리핀에 비유하면 스페인의 악명높은 압제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는 아귀날도와 그의 무리들에 가깝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책은 우리가 필리핀에서 하는 것처럼 해당국 국민의 복지를 위한 것임을 의심할 바는 없다. 그러나 일본의 방법이 우리보다 더 잔혹하고 국민 교육과 자치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고 의문을 제기하긴 힘들다.

장기적으로 이토의 정책이 실현됐을 때 한국인들이 번영과 현대의 문명 사상을 얻을 것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허약한 왕조와 이토가 명목 상의 대장의 수단이라는 탐욕스러운 소수 독재정치에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robi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