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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구체화'할 수 없다면 가짜다!

바람아님 2014. 8. 8. 08:30

(출처-조선일보 2014.08.08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공부하는 재미는 간절함과 명확성에 달렸음을
클레·실레 독특한 畵風 비밀 파헤치며 깨달아
좋은 글도 내 삶에 구현 못하면 무슨 소용이랴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한 달 가까이 유럽의 박물관, 미술관을 헤매다 돌아왔다. 
몇 년 전부터 '인터벨룸(interbellum)', 즉 두 번의 '세계전쟁 사이(between the wars)'에 일어난 
'인식 혁명'을 추적하고 있다. 문명사에서 통합적 설명이 가장 빈약한 부분이다. 
독일의 나치즘으로 인해 모든 지적 흐름과 자료가 흩어져 버려서다. 
'게슈탈트심리학(Gestaltpsychologie)'의 기원을 추적하려고 시작한 공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태어나서 가장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다. 
젠장, 처음부터 공부가 이처럼 행복하고 즐거웠다면 난 이미 노벨상 탔어야 한다.

최근 독일이나 영국의 박물관, 미술관에서는 구입한 책을 해외로 직접 배송해주는 서비스를 한다. 
파리와 비엔나의 서비스는 아직 멀었다. (단언컨대, 잘난 선조 덕에 게으르고 뻣뻣한 이들은 언젠가는 
아주 큰코다친다!) 예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그 두꺼운 예술 책들을 미친 듯이 사서 부쳤다. 일부 
책들은 나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 있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묵직한 책들의 표지만 보고 있어도 마냥 행복하다. 
그러나 이 책들보다 나를 더 흥분시켰던 일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파울 클레(Paul Klee)에곤 실레(Egon Schiele) 그림이 주는 독특한 느낌의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클레의 선과 실레의 색이 주는 느낌이 참 특별했다. 
클레의 따뜻함과 실레의 그로테스크한 섹슈얼리티를 한 장의 그림에 섞을 수만 있다면 엄청 절묘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공부해도 그들 그림이 주는 묘한 느낌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많이 낙담했다. 
그런데 이번에 바로 그 비밀을 찾아낸 것이다.

우선, 실레의 그림이다. 
실레의 에로틱한 그림이 비장한 느낌을 주는 것은 '구아슈(gouache)'라는 불투명 수채화 물감 때문이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비엔나의 레오폴드 박물관에 잔뜩 걸려 있는 실레의 적나라한 여자 그림 밑에 대부분 '구아슈'라는 
불투명 수채화 물감을 사용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 그림들은 몇 번이나 봤지만, 물감 설명은 이번에 처음 봤다. 
궁금해야 눈에 보이는 거다. 요즘은 '구아슈'라는 물감을 거의 안 쓴다. 구아슈는 아무리 밝은색을 써도 수채화의 밝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 아주 음흉한 물감이다.

클레의 경우는 좀 치사(!)했다
스위스 베른의 클레 미술관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주의 깊게 보고 있자니, 클레가 선을 긋는 모습이 잠시 나왔다. 
아, 비밀은 바로 먹지였다. '재현(representation)'에서 '표현(expression)'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했던 클레는 다양한 
표현 수단을 실험했다. 먹지를 사용해 선을 긋는 방법도 그중 하나였다. 아주 간단한 선의 표현 방식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클레는 전혀 새로운 미학적 경험 세계를 창조했다. 뭐, 이 정도 내용이야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상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절실한 궁금함을 직접 관찰하며 스스로 깨달았을 때의 그 기분은 옷을 다 벗고 춤추고 싶을 정도였다.

구체적 추상—클레+실레+피카소 IV.
구체적 추상—
클레+실레+피카소 IV.
 /김정운 그림

공부라는 구체적 경험을 다시 배우는 여름이다. 
스스로의 간절한 필요가 있어야 공부의 방향이 
명확해지고, 그래야만 공부가 재미있어진다. 
30여 년 죽어라 공부하고, 또 십여 년 교수 생활 
하고도 제대로 못 느껴봤던 진짜 공부를 나이 
오십 넘어 뒤늦게 하고 있다. 
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돈은 아주 막연한 거다그 돈으로 뭘 하고 
싶은지 분명하지 않으면 돈은 재앙이다. 
사회적 지위도 마찬가지다. 그 지위로 인해 내가 
뭘 하고 싶은 것인지 분명치 않으니 다른 사람들 
굴복시키는 헛된 권력만 탐하게 된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비슷한 주장의 책을 읽었다. 
행복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아주 비장한
외모의 서은국 교수가 쓴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이다. 교수들의 글은 대부분 결론이 애매하다. 
명확한 결론에 따른 비난을 감수하기 싫어서다. 
그러나 서 교수의 메시지는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다. 
행복감이란 생존과 종족 보존을 위한 수단일 따름이며 행복은 아주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진화심리학적 설명이 자주 맘에 안 들었지만 그 과감한 주장은 모처럼 감동적이었다. 그가 주장하는 행복이란 한마디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거 먹는 데 있다'는 거다. (이렇게 단순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서 교수가 얼마나 많은 연구와 문헌을 조사했는지는 그의 책을 직접 한번 읽어보시라!)

나도 수년간 마찬가지 주장을 해 왔다. 행복하려면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구체적으로 기분이 좋아야 한다. 
대부분 침대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고급 호텔이 기분 좋은 이유는 하얀 시트 커버와 백열등의 부분 조명 때문이다. 
집의 침실을 호텔처럼 하얀 침대 시트 커버와 부분 조명으로 바꾸면 누구나 잘할 수 있다, 등등. 
허약한 외모의 서 교수는 '먹는 것'을 강조했고, 한때 왕성했던 나는 '자는 것'을 강조한 차이일 뿐이다. 
서 교수와 나의 주장을 합치면 행복의 조건은 더욱 분명해진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것 자주 먹고, 하얀 시트 커버의 침대에서 잘하는 거, 혹은 잘 자는 거다.' 
행복은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이란 이야기다.

난무하는 자기계발서의 추상적 언어로 아무리 자기최면을 걸어도 
자신의 구체적 생활 언어로 번역할 수 없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뿐만이 아니다. 
삶을 지탱하는 모든 가치와 이념이 그렇다. 
추상적 언어가 현실에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구체적 어휘(vocabulary)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되었다 할지라도, 내 삶에서 구체화될 수 없다면 그건 순 가짜다. 
거짓말이라는 이야기다.

리더를 자처하는 이들의 현란한 미사여구가 헷갈릴수록 질문해야 한다.
구체화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