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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돼지 기름을 사랑한 사람들

바람아님 2015. 3. 4. 21:29

(출처-조선일보 2015.03.04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돼지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국인뿐만 아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생돼지 삼겹살이나 비계를 소금에 절인 '살라'를 즐겨 먹는다. 
원래는 우크라이나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전 러시아인이 사랑하는 음식이다. 
얇게 썰어서 빵에 얹어 먹거나 보드카 안주로 먹는다. 
짭짤하고 고소해서 러시아 유학 시절 나도 무척 좋아했다. 
특히 시베리아에서 문화재 발굴을 할 때 밤에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는 날에는 살라 두어 점에 
보드카 한 잔으로 몸을 데운 후 침낭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러시아뿐 아니라 서유럽과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들은 고열량이면서 추운 기후에 피부를 보호해주는 
돼지비계를 사랑했다. 우리 민족을 포함한 동이족의 삼겹살 사랑도 2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극동지역 북방에 살았던 읍루인이 화장실을 집 안에 두고 몸에 돼지기름을 바르는 미개한 사람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집안에 오줌을 모아둔 것은 암모니아 성분을 이용해서 모피를 가공하고 의복을 세탁하기 위한 것이며, 
돼지기름은 추운 겨울에 동상을 막고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고처럼 바른 것이다. 
중국인들은 읍루인의 겉모습만 보고 미개한 사람으로 간주했지만, 사실은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한 지혜의 산물이었다. 
읍루인의 후예인 만주족은 지금도 매년 새해가 되면 살코기와 피를 섞은 순대와 얼린 돼지 껍질(猪皮凍)을 만들어 먹는다.

유라시아 북방지역의 경우 1년의 절반 이상은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겨울이다. 
그러니 아무리 용맹스러운 유목민이라고 한들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없다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이런 북방지역의 기후를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 문명의 잣대로 그들을 판단했던 과거 역사 기록 때문에 읍루를 비롯한 
북방의 역사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미개하다고 얕봤던 읍루인은 이후 말갈과 여진으로 이어졌고 청나라를 건국해 중원을 정복했다. 
최근 값이 폭등했다고 해도 여전히 서민들이 가장 애용하는 회식 메뉴인 삼겹살에는 북방 유라시아의 지혜가 숨어 있다.

[일사일언] 돼지 기름을 사랑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