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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의 뿌리는 어디인가 - 37년을 준비해 36년을 지배한 일본의 치밀함

바람아님 2015. 4. 1. 09:40

[J플러스] 입력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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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9일 오전 광복회 충청북도지부와 청주시지회 회원들이 청주 중앙공원에서 103주년 경술국치일 행사를 열고 있다. 

사진= 청주시 제공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제3대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는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1858~1926)을 남산 기슭의 통감 관저로 불러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한다. 공식 발표가 난 것은 일주일 후인 29일이었기에 이날을 우리는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날로 기억한다.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부끄러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최후의 절차였을 뿐이다. 우리는 이완용을 비롯한 몇몇 친일파를 지목해 내는 일에 익숙하지만 그 부끄러움의 뿌리는 우리의 관행보다 훨씬 깊고도 넓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던 지난 2010년 8월, 망국의 뿌리를 찾아보기 위해 일본 현지를 답사 취재했던 기억이 요즘처럼 새록새록 떠오르는 때도 없을 듯싶다.
조선 정벌에서 일본의 이익을 찾는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한 1873년부터 한국병합조약이 강제 조인되는 1910년까지 적어도 37년이란 준비 기간이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일제는 조선침략을 위해 37년을 준비해 36년을 지배한 셈이다. 일본이 정한론을 실현해 가는 과정은 치밀했다. 궁극 목표는 만주 대륙 진출이었고, 1차 관문이 한국 정복이었다. 37년의 준비 기간 동안 청일전쟁-시모노세키조약-영일동맹-러일전쟁-가쓰라·태프트밀약-포츠머스조약-을사늑약 등을 거치며 일본의 한국병합은 구체화됐다.
 
강제병합 당시 일본 정부의 책임자는 가쓰라 다로(桂太郞·1848~1913) 총리였고, 실무 책임자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1855~1911) 외무대신이었다. 한국 병합 관련 결정적인 외교문서 체결에는 그들이 빠지지 않는다.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직전에 체결된 ‘망국을 이끈 1905년의 3대 조약’(가쓰라·태프트 밀약-제2차 영·일동맹-러·일 포츠머스 조약) 뒤에도 가쓰라와 고무라가 있었다. 일본은 미국, 영국, 러시아와의 외교 협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굴복시켜 나갔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는 “미국은 러일전쟁 후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가 1905년 7월 27일 일본 도쿄에서 비밀리에 합의했다. 이 밀약은 7월 31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에 의해 추인됐다. 당시 국제 질서의 변동에 무력했던 우리 역사의 실상은 그로부터 5일 후인 8월 5일 대한제국 특사 이승만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젊은 시절 일화로 잘 알려지지 않은 대목이다. 고종 황제의 측근이자 친미파인 민영환·한규설의 밀사로 이승만이 발탁돼 미국에 온 것이었다. 그의 임무는 미국과 조선이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러일전쟁 종결 후 대한제국이 독립을 보존할 수 있도록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란 존재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던 상황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승만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러·일 포츠머스 강화조약(1905년 9월 5일)에 모두 관여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고무라 외무대신은 하버드대 동문이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문건은 그로부터 19년 뒤(1924년)에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에 의해 발견돼 공개됐다. 이때의 기억을 이승만은 잊지 않았다. 기회만 있으면 ‘미국의 배신’을 언급했다. 1941년 펴낸 영문 저서 『일본 내막기』에서부터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각종 편지와 외교활동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거론했다.
 
가쓰라 다로 총리는 야마구치현 하기(萩) 출신이다, 메이지유신의 발상지인 야마구치현 하기에는 가쓰라의 생가와 동상이 보존돼 있다. 고무라 외무대신의 고향인 미야자키현 오비에도 1m56㎝의 단신 고무라의 동상과 생가가 보존돼 있고 기념관도 설치돼 있다. 일본은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 정한론 주창자로 간주되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지금도 일본에서 당시 인물 중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최후의 사무라이’로 통한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 가고시마현은 물론 도쿄 우에노 공원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베 총리의 사상 첫 미 상·하원 합동연설이 4월 29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은 한·일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껄끄러운 상황에 전해진 것이어서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일 동맹을 강화하려는 차원에서 아베 총리의 미 상·하원 합동연설을 용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아베의 연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 발언이나 존 매케인 상원 군사위원장이 스스로를 열렬한 아베 지지자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외교적 수사로만 이해하기엔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이같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본은 또 얼마나 많은 준비 과정을 거쳤을까. 일본에서 정한론이 등장한 1873년 무렵부터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거대한 재편기에 들어갔던 역사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가입,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 배치 등과 맞물려 국제정치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동아시아 역사의 주역과 국가 간 힘의 강약은 100여 년 전과 많이 달라졌을 지라도 그때와 지금이 유사한 흐름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배영대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