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自然과 動.植物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세요

바람아님 2015. 6. 10. 08:15

한국일보 2015-6-10

 

씨앗을 다 날려 보낸 서양민들레의 꽃대.

다닥냉이 꽃대에 '다닥다닥' 붙은 씨방. 한껏 부풀어 오른 씨방이 터지면서 씨앗을 퍼뜨린다.

새끼손톱 만한 풀꽃이 보도블록 사이에 조용히 피었다.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 수수한 꽃잎 위 붉은 반점이 강렬하다. 꿀 따러 온 손님을 안내하기 위한 특별한 색채 배치 '허니 가이드'다. 그 주변으론 여러 개의 수술이 자리를 잡았다. 주름잎은 꿀을 주는 대신 곤충의 몸에 꽃가루를 묻혀 보내는 고도의 번식 전략을 수행하는 중이다. 벽돌 하나 건너 또 다른 틈새에선 다닥다닥 붙은 씨방 수백 개가 한껏 부풀어 있다. 폭죽 터지듯 한꺼번에 씨앗을 퍼뜨릴 기회를 엿보는 잡풀의 이름은 다닥냉이. 한 뼘 거리의 서양민들레는 씨앗을 모두 날려 보낸 후 꽃대만 남아 유유히 바람결을 타고 있다.

 

 

 

새끼손톱 크기의 주름잎 꽃(오른쪽)과 꽃잎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 '허니 가이드'. 꿀의 위치를 곤충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보도블록이나 콘크리트의 갈라진 공간에 뿌리를 내린 천덕꾸러기, 주목 받지 못한 풀꽃의 이른 여름날이 제법 드라마틱하다. 존재감이라곤 없어 보이는 잡풀이지만 알고 보면 저마다 특별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름 모를 잡초'란 말도 이름이 없어서라기 보다 있는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는 서러운 신세의 다른 표현 아닐까.

쑥의 여린 잎. 하얀 솜털이 인상적이다.

강아지풀

큰방가지똥

회색 콘크리트 바닥을 비집고 나와 노란 꽃망울까지 틔운 개갓냉이. 냉이 맛도 갓 맛도 아닌 것이 그리 훌륭하지는 않은 탓에 맨 앞에'개'자가 붙었다. 동그란 꽃 모양이 스님 머리를 닮았다는 중대가리풀은 비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군락을 이루며 번식한다. '작다'는 표현을 '개미'나 '빈대'로 대신하는 작명 센스도 흥미롭다. 오직 종자번식만을 위해 꽃망울의 크기는 작아지고 개수는 많아진 개미자리가 육교 계단에 자리잡은 모양이 풍성한 안개꽃 같다.

개갓냉이

중대가리풀. 가운데 부분에서 동그란 모양의 꽃이 핀다.

개미자리. 검은 부분은 열매

애기땅빈대는 어디서든 살아남는 질긴 생명력이 가장 큰 매력이다. 요즘엔 생명력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쇠비름과 함께 항암제 성분을 지닌 약재로 대우 받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해답을 심산유곡의 약초 대신 도심 잡풀의 강인한 생명력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야생고양이의 먹이라는 뜻의 괭이밥 역시 새콤한 맛에 들어 있는 옥살산(Oxalic acid) 성분이 배앓이를 다스려 야생동물의 자가치료를 담당한다.

괭이밥 꽃(왼쪽)과 잎

괭이밥, 점나도나물, 애기땅빈대(왼쪽부터)

쇠비름과 애기땅빈대, 제비꽃 여린 잎, 엽상지의류(왼쪽부터)

잡풀의 씨앗은 바람에 날리거나 동물의 배설물에 섞여서, 또는 사람들의 옷자락 등에 붙어 또 다른 환경으로 이동한다. 아무리 작은 콘크리트 틈이라도 먼지나 낙엽이 쌓이는 등 발아 조건만 된다면 토양이 없어도 싹을 틔운다. 그 다음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는 문제는 각자의 운명에 달렸다. "각종 오염물질이 넘쳐나는 척박한 도심에서 살아나는 잡풀의 생명력은 경이로울 따름이죠" 이경숙 들풀생태마당 대표는 "메르스와 같은 역경을 이겨내는 용기와 적응력까지도 작은 들풀의 강인한 생명력에서 충분히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또 "길가에 핀 잡풀 꽃도 화단에 심어 가꾸면 근사한 야생화가 되듯 대하는 관점에 따라 잡풀의 존재감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꽃, 김춘수). 먼 발치에 흔하게 널린 잡풀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삭막한 도심이 화원으로 다가오는 상상에 초여름 따가운 햇살이 즐겁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mailto: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mailto:jsknight@hankookilbo.com)

보도에 깔린 벽돌의 빈 공간을 각종 잡풀과 지의류가 차지하고 있다.

배수구 아래 공간을 빼곡히 채운 잡풀들

씀바귀

중대가리풀 어린 잎

망초

중대가리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