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고향/황성규 논설위원

바람아님 2015. 9. 30. 09:19

[오피니언] 오후여담 문화일보 : 2015년 09월 25일(金)


청록파 시인 박목월은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언제나 경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경북 월성군(현 경주시) 서면 모량리가 본적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곳은 경남 사천군 고성이나, 겨우 ‘여섯 달 있다가’ 경주로 갔기에 고성을 고향이라고 말하기에 뭣하다는 해명이 따랐다. 국어사전을 놓고 보면 고향의 첫째 풀이말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 아니라, 둘째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을 따랐다.

목월의 말을 빌리면 고향은 기억 속에 풍경들이 남아 있어야 한다. 먼저, 어릴 적 기억들을 새롭게 해주는 아버지 어머니나 할아버지 할머니, 형·누나들, 그리고 또래 동무 같은 스토리의 주인공들이 선연해야 한다. 다음으론 소리가 있어야 한다. 얼룩빼기 황소의 게으른 울음이나 워낭 소리, 돼지 염소 닭이며 까치 장끼며 매미나 귀뚜라미 소리 등…. 특히, 정겨운 음색이 빠져선 안 된다. 투박한 사투리 말이다. 타향에서처럼 표준어 통역이 필요하지 않은, 입말로 술술 나오는 토박이말이 언어의 DNA로 남아 있어야 고향이다. 여기에다 고향이라 하면 흑백필름 같은 시각적 기억이 필요하다. 수백 년 묵은 동구 밖 느티나무나 실개천이라든지 서낭당이나 기와집 또는 초가 같은 랜드마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있어야 할 게 또 있다. 미각이다. 맛은 대개 어머니의 손끝에서 나의 혀끝으로 전해온다. 자연산 먹거리 외에도 밥, 떡, 간장·된장, 김치와 술·식혜 맛이 빠질 수 없다. 고향(故鄕)의 ‘시골 향(鄕)’ 자도 본디는 밥을 차린 상(낟알 급·급)을 앞에 두고 마주 꿇어앉은 두 사람을 나타내는 상형 문자다. 시골을 뜻하게 된 것은, 마주 보고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 확장돼 고샅길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마주 보고 늘어선 마을을 가리키게 됐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이라면 한솥밥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들 아닌가.

누구에게나 있는 고향이지만, 저마다 사람과 빛깔과 소리와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타향은 현재형이지만 고향은 언제나 과거형이다. 요즘에는 고향의 세 번째 풀이말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즉 마음의 고향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밖에 제2의 고향, 떠도는 고향, 정치적 고향을 얘기하며 자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만큼 고향의 의미가 다양해지고 있다. 다문화가족, 이산가족, 단핵가족이 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성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