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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화 기행] (15) 밀라노가 아니었으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없었다

바람아님 2013. 9. 4. 12:18
                    (15) 이탈리아 밀라노

성화의 관례를 깬 다소 불경한 그림들
다빈치의 창의성을 포용한 신흥도시
화가 다빈치는 '일부'…군사전문가·조각가…파티플래너까지도                


역사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만큼 많은 오해와 억측을 불러일으킨 그림도 드물 것이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그림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 왼편의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주장이다.

초기 기독교의 이단적 교파에서는 예수가 막달레나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막달레나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 인물이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예수와 서로 대칭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림에서 예수는 붉은색 옷 위에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고,여인은 푸른색 옷 위에 붉은 색 망토를 걸치고 있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또 예수와 여인 사이에는 V자형의 골이 파여 마치 M자와 같은 모양인데,이 M은 바로 막달레나의

이니셜이라는 주장이다. 2003년 발표돼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바로 이러한 속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억측을 불러일으킨 다빈치의 작품은 이것 말고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암굴의 성모'가 있다. 어린 예수가 살해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갔을 때 예수가 동굴에서 자신의 조카이자 제자인 요한을 만난다는 내용을 그린 이 작품은 전통적 성화의

관례를 깨뜨려 문제를 일으켰다. 통상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그린 작품에서 성모의 옆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려지는 게

관례였지만 여기서는 성모의 옆자리에 예수 대신 세례자 요한이 그려져 있고,예수는 그림 앞쪽에 등을 돌린 채 마치 조역처럼

묘사돼 있다. 게다가 성모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요한의 어깨를 다정스레 감싸고 있고,오른쪽의 대천사 가브리엘은 손가락으로

요한을 가리키고 있다. 이 그림에서 예수는 찬밥 신세인 것이다. 이 그림을 주문한 교회는 작품을 받아들고 새파랗게 질렸다고

한다. 결국 다빈치는 좀 더 보수적인 도상을 따라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했다.

다빈치가 다소 불경스럽고 의혹 투성이인 이 작품들을 그린 곳은 이탈리아 북부 중심도시인 밀라노다. 당시만 해도 신흥

도시였던 밀라노는 대륙과 반도를 잇는 중심에 있어 사방에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외래문화에 대한 포용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곳이었다. 특히 야심만만한 로도비코 스포르차가 나이 어린 조카를 대신해 밀라노

공국의 섭정으로 통치하면서 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그의 매력적인 부인 베아트리체 데스테였다. 그녀는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남편에게

추천하고 후원하게 했다. 화가이자 과학자인 다빈치가 스포르차 궁정의 중심적인 존재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데스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여튼 다빈치의 문제작들은 이러한 밀라노의 포용성을 빼고선 생각하기 힘들다. 만약 로마였다면

다빈치가 과연 이렇게 도전적인 그림들을 그릴 수 있었을까?

다빈치는 모든 분야에 두루 정통한 만능의 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남긴 그림과 노트의 데생들을 살펴보면

그의 무한한 재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가로서의 다빈치는 한 단면에 불과하다. 그는 과학자,

해부학자,군사전문가,건축가이면서 동시에 조각가,공예가,디자이너,음악가이기도 했다.

그가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눈에 들게 된 중요한 이유도 군사 분야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강국을 꿈꾸던 스포르차에게

다빈치의 군사적 재능은 매력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다빈치도 자신의 누울 자리를 잘 알고 있었다. 보수적인 전통이 지배하는

로마와 메디치가의 기호에 좌우되는 피렌체는 자신의 꿈을 펼치기에 적절치 않은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다빈치는 의욕에 찬

30~40대의 20년을 밀라노에서 펼치게 된 것이다.

스포르차는 다빈치에게 군사적 지식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궁정 개축에 박차를 가하고

브라만테와 다빈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가문의 문장 디자인 등 창조성이 요구되는 분야라면 무엇이든 다빈치를 믿고 맡겼다.

 

다빈치는 1491년 로도비코가 베아트리체 데스테를 신부로 맞이하는 날 결혼피로연의 조직과

총지휘를 맡았다. 연회장의 전체 구성은 물론 접대 음식의 선택,테이블 세팅,연회장의 세부적

장식 및 가수와 악사 초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다. 다빈치가 로도비코의 안방마님이

된 베아트리체의 후원을 받게 된 계기도 이날의 성공에 힘입은 바 컸다. 이날의 파티가 얼마나 대단

했는지는 신성 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가 자신의 결혼식 파티를 조직하는 데 다빈치를

초대했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밀라노의 중심은 두오모 광장이다. 이 광장의 동쪽에 자리한 두오모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의 성당으로,브이(V)자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독특한 실루엣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성당 옆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가 있다. 이곳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세계 최초의 쇼핑몰로 명품숍과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유리 천장의 아케이드를 따라 200여m를 걸으면 꿈의 무대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과 만난다.

다빈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스포르체스코 궁은 광장에서 북서쪽으로 난 단테거리를 따라가면 되고 '최후의 만찬'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은 광장 서쪽의 마젠타 거리에 있다.

다빈치의 흔적은 명품 부티크가 집결돼 있는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와 스피가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멋쟁이들에게서도 확인된

다. 그들의 개성적인 헤어스타일,액세서리,심플하면서도 세련된 옷차림은 그가 1484년 로도비코의 정부를 그린 '세실리아

갈레라니 초상'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초상에서 다빈치는 갈레라니의 머리를 피부에 바짝 붙게 빗질해서 마치 모자를 쓴 것처럼 독특하게 연출했고,검정색의 구슬목걸이를 새하얀 목에 두 번 둘러 장식성을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그가 1497년 스케치한 여성용 지갑은 지금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에서 만나는 젊은 여성의 손에 들려도 결코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패션의 메카' 밀라노의 명성 뒤에도 다빈치는 살아 숨쉬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다빈치를 만능의 천재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


예수와 유다가 동일인물?…다빈치 그림의 의혹들

다빈치의 그림을 둘러싼 의혹들은 또 있다. 민간에 떠도는 얘기 중 흥미로운 것은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와

유다를 그릴 때 같은 모델을 썼다는 주장이다.

다빈치는 작품 제작 초기에 예수를 그리기 위해 한 순박한 젊은이를 모델로 고용했는데 글쎄 이 사람이 몇 년 뒤 유다를 그리기 위해 고용한 범죄자와 동일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다빈치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후대에 꾸며낸 것으로 보인다.

'모나리자'에 대한 댄 브라운의 주장도 흥미롭다. 그는 남성과 여성이 통합된 듯한 중성적

이미지를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성스러운 통합,즉 남성과 여성의 성스러운 결합을

지향한 (따라서 남성 중심의 교리를 확립하려 한 주류 기독교의 반발을 산) 초기 기독교 교파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다빈치는 이런 입장을 계승한 비밀 조직 시온수도회의 그랜드 마스터(교파의 수장)였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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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실리아 갈레라니 초상'                                                                     모나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