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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한국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한국 사회

바람아님 2019. 6. 18. 08:42
매경이코노미 2019.06.17. 10:00
“공장이 있는 인도네시아에 다녀올 때마다 다른 세상에 살다 온 느낌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일자리 만들어줬다고 국빈 취급 해줍니다. 뭐든 도와줄 테니 말하라는 것은 물론이고, 은근 존경의 눈초리도 보냅니다. 그런데 한국에만 오면 온통 싸늘해지는 느낌입니다. 세무조사 받을 때마다 죄인이 된 것 같고… 인도네시아에 정착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잘나가는 신발업체 A회장의 토로입니다.


여기저기서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다들 한목소리로 한국 사회의 피로감이 극심하다고 토로합니다. 경제는 출구가 없어 보이고, 정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시끄럽습니다. 공무원은 혹여 다음 정권 때 다칠까 몸을 사려 아무 일도 안 한다고 난리고, 규제는 풀리긴커녕 나날이 더욱 옥죄어옵니다. ‘리디노미네이션’ 얘기가 다시 나오면서 ‘세상이 확 뒤바뀌는 것 아닌가’ 겁이 난다는 이들도 수두룩합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긴커녕 필리핀이나 심지어 베네수엘라처럼 되면 어쩌나 걱정하는 이도 한둘이 아닙니다. 상류층은 상속세니 증여세에 머리 아픕니다. ‘돈 있는 사람’을 싸잡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도 마땅치 않습니다. 중산층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집값에 지옥 같은 경쟁과 그로 인한 사교육비에 치일 대로 치여 의욕이 없습니다. 서민은 계층 사다리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은 한국 사회에 숨이 막힙니다.


아무리 한국을 떠나고 싶어도 서민과 중산층은 쉽게 결단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최근의 이민 붐에서 고액 자산가 투자이민이 특히 눈에 띄는 이유입니다. 한 이민업체 관계자는 “예전에는 아메리칸 드림이나 자녀 교육을 위한 30~40대가 많았다면 지금은 상속을 위해 가겠다는 50~70대가 다수”라고 귀띔합니다.


고액 자산가 투자이민을 한 꺼풀 벗겨보면 편법 증여를 위한 이민이 상당수라는 게 이민 컨설팅 업체 B사장 얘기입니다.

“투자이민으로 미국 영주권을 얻으면 자산을 해외로 반출할 수 있어요. 미국에서는 1140만달러(약 134억원)까지 증여세가 면제됩니다. 정부가 2018년 1월부터 국외전출세를 도입해 상장기업 대주주와 비상장기업 4% 이상 지분을 소유한 사람이 영주권을 얻을 경우 보유 지분을 양도한 것으로 간주하고 양도세를 내게 합니다. 그래서 본인이 아닌 부인과 자녀가 영주권을 얻게 한 후 부인이 자금을 반출해 자녀에게 증여하는 방법을 택하지요. 7년 동안 미국 한번 안 가도 상관없고요. 요즘 이민 상담하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이것부터 물어봅니다.”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 커버스토리를 준비하며 그 어느 때보다 씁쓸했습니다. ‘떠나는 이들을 붙잡을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을 못 찾아 대신 ‘나가더라도 잘 나가는 팁’을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편법 증여를 위해 편법 이민을 택하는 이들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정말 문제는 사람들이 줄줄이 떠나게 만드는 사회입니다.


[김소연 부장 sky6592@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13호 (2019.06.19~2019.06.25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