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09.22)
21일 조간신문에 보도된 스물여덟 살 젊은이 안치범씨의 의행(義行)을 읽은 독자 상당수는 맨 먼저
'나라면 그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라고 스스로 물음을 던져봤을 것이다. 자신 있게 그렇다고 생각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안씨도 짧은 순간 그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5층 빌라에 지난 9일 새벽 4시쯤
불이 났을 때 4층 살던 안씨는 1층 밖으로 뛰쳐나와 119에 신고했다.
경찰이 나중에 CCTV를 봤더니 안씨는 빌라 건물을 몇 차례 올려다보며 머뭇거리더니 다시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중에 그는 5층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
유독가스에 질식해 뇌사 상태에 빠진 안씨는 20일 숨지고 말았다.
불은 동거녀의 이별 통보에 격분한 어느 20대 남자가 홧김에 질러 3층에서 시작됐다.
안씨는 방마다 초인종을 누르고 소리를 질러 이웃들을 대피시켰다.
안씨 덕분에 원룸이 21개 있는 이 건물에서 다른 사망자는 없었다. 3층에서 불이 났으면 4~5층은 연기가 자욱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안씨는 5층까지 올라가 이웃들을 탈출시키느라 뛰어다니다 쓰러지고 말았다.
안씨는 성우 지망생이었다. 성우 학원에 다니려고 지난 6월 빌라 원룸으로 이사 왔다고 한다.
학원 원장이 "원장 자리 물려주겠다고 했는데"라고 할 만큼 성실한 청년이었다.
장애인 봉사활동도 하겠다고 신청했는데 안씨가 쓰러진 후 소식이 없자 봉사 담당자가 수소문 끝에 병원에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은 수백 명 학생을 가라앉는 배 속에 내팽개치고 자기들만 도망 나왔다.
세상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곳곳에서 자기 이해타산만 따지는 사람을 수도 없이 보게 된다.
그런 속에서 안씨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접하게 돼 더 가슴이 먹먹해진다.
꽃도 못 피워보고 스러진 고귀한 영혼은 세상 한 자락 비춰주는 불빛이 될 것이다.
원룸 건물 불길속에 스러진 '초인종 義人'
(조선일보 2016.09.21) |
성우 꿈꾸던 20대 청년 안치범씨 방마다 초인종 눌러 "대피하세요" 21개 원룸… 이웃 살리고 혼자 숨져불이 난 5층 건물에 뛰어든 후 자고 있던 주민들을 깨워 탈출시킨 뒤 쓰러진 20대 청년이 11일 만에 끝내 숨졌다.
지난 9일 오전 4시 20분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5층짜리 건물에 큰 불이 났다. 여자 친구의 이별 통보에 분노한 20대 남성이 홧김에 지른 불이었다.
불이 나자 이 건물 4층에 살던 안치범(28·사진)씨는 탈출한 뒤 119에 신고하고 다시 연기로 가득 찬 건물로 뛰어들었다. 불이 난 사실을 모른 채 잠든 다른 주민들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안씨의 이웃들은 경찰에서 "새벽에 자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나오세요'라고 외쳐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안씨 덕분에 원룸 21개가 있는 이 건물에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안씨는 건물 5층 옥상 입구 부근에서 유독 가스에 질식해 쓰러진 채 발견됐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20일 오전 사망했다. 경찰 관계자는 "신고를 마친 안씨가 건물을 수차례 올려보다 다시 건물 안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CCTV에 잡혔다"고 말했다.
안씨는 생전 성우가 되는 걸 꿈꿨다. 합정역 인근에 있는 성우 학원에 다니기 위해 지난 6월 근처 원룸으로 이사와 살다 변을 당했다고 유족은 전했다. 20일은 평소 안씨가 지망하던 방송사의 입사 원서 접수 마감일이었다. 안씨의 아버지(62)는 "처음엔 불길 속에 뛰어든 아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잘했다, 아들아'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