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강천석 칼럼] 누가 이런 한국을 두려워하랴

바람아님 2017. 3. 4. 00:37

조선일보 2017.03.03 23:19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사이에서 膽力 대결 벌이는 탄핵 정치
자격 잃은 대통령, 자격 의심받는 有力 후보.. '腦死 국가' 만들어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놓여 있다. 미국이 보기에 일본과 중국 관계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이웃사촌이다. 우선 경제력이 막강하다. 중국은 미국 다음이고 일본은 완만한 내리막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세계 3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군사력 증강 추세는 놀랍도록 가파르다. 국방 예산 규모는 미국·중국·일본 순(順)이다. 한국의 서해·남해·동해는 이미 중국 바다·일본 바다가 돼 버렸다.


미국이 두 나라 관계에 내재(內在)한 위험성에 예민하게 대처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역사의 은원(恩怨)을 말끔히 씻지 못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국민 마음 바닥에도 서로 상대를 두려워하는 공중(恐中)·공일(恐日)의 앙금이 가라앉아 있다.'근접성(近接性)의 위험(The perils of proximity)'이란 책에는 양국 관계의 내일을 위태스럽게 바라보는 미국의 걱정이 담겨 있다. 저자는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 동북아정책실장이다. 세계 최강대국 입장에서도 중국과 일본은 한시도 눈을 떼기 힘든 위험한 대국(大國)이다.


한국은 중국과 등을 맞대고 일본과는 배를 마주하고 있다. 언제 어느 쪽 칼이 들어와도 놀랄 처지가 못 된다. 이 낭떠러지 국가 한국 서울 복판을 작년 11월 29일 이후 매주 토요일마다 수십만 '촛불부대'와 '태극기부대'가 휩쓸어갔다. 정부는 그저 숨만 쉬고 있었다. 숨 쉰다는 게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뇌사(腦死) 국가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사이에 낀 한국의 무신경(無神經)은 담대(膽大)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어리석음의 표시일까.


냉전 시대 미국의 소련 봉쇄정책을 기안(起案)했던 조지 케넌(1904~2005)은 생애 말기 조국에 전략적 유언(遺言)을 남겼다. "미국 안보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미국의 힘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패권(?權) 국가도 힘의 한계를 모르고 처신하면 언제든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다. 이런 미국 눈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한국이 북한의 핵위협 아래서 코를 고는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동맹국으로 믿어도 되나 하는 불신(不信)이 자랐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도 달라졌다. 중국은 한때 한국을 미국에서 떼낼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미끼를 던졌다. 일본은 중국 파도를 막기 위한 한·미·일 방파제(防波堤) 강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은 물론 일본 편에 섰다. 한국이 미국·중국·일본에서 동시에 구애(求愛)를 받고 있다는 행복한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미동맹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안보 환경과 한·중 교역을 무시할 수 없는 경제 환경은 언젠간 공존(共存)의 한계에 부딪히게 돼 있었다.


사드 배치 결정을 미루고 미룬 한국 태도는 중국의 헛된 환상(幻想)을 부풀리고 미국과 일본의 의심을 키우는 역작용(逆作用)을 낳았다. 중국은 사드 배치 결정에 무차별 경제 보복을 퍼붓고, 일본은 부산영사관 앞 소녀상 건립에 주한(駐韓) 대사 소환이라는 과잉(過剩) 카드를 뽑아들었다. 세계 2·3위 경제·군사 대국의 경제·외교 양면(兩面) 보복을 동시에 받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건국 이래 초유(初有) 사태다. 이 중대 국면에 정부는 혼수(昏睡) 상태다.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動力)은 행동의 의도(意圖)가 아니라 행동의 결과다. 현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이 다급하면 입에 올리는 선의(善意)라는 단어는 실패를 가리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촛불부대에 먼저 불을 붙인 것은 대통령의 실정(失政)이고 태극기부대를 끌어모은 것은 문재인 민주당 전(前) 대표의 과욕(過慾)이다. 대통령 자격을 잃은 대통령과 대통령이 될 자격을 의심받는 유력(有力) 후보가 국정 농단(壟斷)과 오판(誤判)을 '선의'라는 단어로 포장하고 있다.

촛불부대는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선의'를, 태극기부대는 '나라를 구출하겠다는 선의'의 깃발을 들고 있다. 그런 두 부대가 모두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의사 표명은 거부한다.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쪽은 혁명의 길로 나서고 다른 한쪽은 아스팔트에 피를 칠하겠다고 공언(公言)하고 있다. 무슨 결정이 내려져도 한쪽 부대는 나라를 존망(存亡)의 낭떠러지로 몰아넣을 것이다. 선거에 패배할 경우 결과에 불복(不服)하겠다고 미리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국심(愛國心)은 어디다 버렸는가.


1930년대 미국 갱(gang)들은 마주 보고 전 속력으로 차를 몰며 누가 비겁하게 먼저 핸들을 꺾나 하는 담력(膽力) 대결을 벌였다. 미국의 무법(無法) 시대였다. 2017년 대한민국 대통령과 유력 후보가 지금 그 대결을 벌이고 있다. 이런 무법(無法) 국가를 세계 어느 나라가 존중하고 두려워하겠는가. 100년 전 세계의 업신여김을 받던 조선은 끝내 망국(亡國)을 맞았다.